회복적 정의에 대한 질문들 l 주제글5 l 학교
잘못된 옳은 소리
서영호 전북중 교사
*전주 전북중 교사, ‘회복적 정의는 민주시민교육이다’라고 믿는다.
동료교사들과 교사공동체를 일구며 안전하고 평화로운 학교 만들기에 관심이 많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생각을 하게 된다. 질문을 던진다. 널리 배우고(博學) 절실하게 묻고(切問) 일상생활 속에서 생각(近思)하는 행위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행위다. 질문의 그물망 크기가 깨달음의 크기다. 아인슈타인이 우주에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E=MC²,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뉴턴이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 만유인력. 진화의 역사는 질문의 역사다.
구약성경에서 유래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과잉형벌 금지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齒)만 부러뜨렸는데 왜 목숨까지 빼앗을까?’라는 문제제기에 대한 해답 말이다. 갑자기 주먹을 날려 치아에 손상을 입힌 가해자에게 동태(同態) 이상의 처벌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인권보호정신이 기저에 깔린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응보적 정의를 상징하는 문구가 되었다. 아이러니다.
응보적 정의의 잇몸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근대국가가 등장한 이후 체계화되었고 갈수록 촘촘한 그물망으로 사회를 통제해온 응보적 정의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피는 내가 흘리고 있는데 가해자는 왜 판사에게 반성문을 쓸까? 상처로 인해 여전히 골방에서 괴로워하는데 형기를 마친 가해자는 당당히 대로를 활보하고 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정의의 렌즈를 바꿔야 되는 것 아닌가? 질문하고 있다.
‘잘못은 피해를 낳고 그 피해를 회복하는 것이 정의다.’ 가해자에 대한 응보적 입장에 두었던 무게추를 피해자 회복으로 옮기는 관점(렌즈)의 변환, 정의의 렌즈를 바꾸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진리는 없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는 진리인식에 대한 근본적 위기 상황에서 철학자 칸트의 질문. “진리를 대상(사물)에서 찾지 않고 대상을 보는 인간의 사고체계(선험적 종합판단)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흔들리는 근대철학의 잇몸을 치료하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한 철학자의 집요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었다. 스스로 대견했던지 칸트는 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당신에게 회복적 정의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민주시민교육이라 답한다. 피해자의 회복이라는 체인징 렌즈(changing lenses)는 정의의 법정에서 그간 소외되어 있던 당사자(가해자와 피해자)를 ‘주체’로 뒤바꾼다. 방법은 일방적 질책이 아니라 열린 질문이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자신 입장에서 말해보세요.” 질문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생각하는 지점이 달라지고 태도가 변한다. 자발적 책임, 관계 회복, 공동체 회복은 첫 단추를 잘 끼운 덕분이다. 시작이 반이다.
또 회복적 정의는 교실 내 ‘관심’의 대상을 뒤바꾼다. 말썽부리는 5%보다 조용한 80%에 주목한다. 회복적 생활교육 실천가 브렌다 모리슨(Brenda Morrison)이 일찍이 말했듯이 신뢰 서클, 존중의 약속, 평화감수성 훈련, 회복적 질문 등을 통해 형성된 평화적 하부구조에 바탕한 건강한 또래 압력을 안전하고 평온한 학급을 만드는 데 주요 동력으로 사용한다. 자칫 소수의 악화가 다수의 양화를 구축(驅逐)하기 쉬운 현실에서 매우 효율적인 역발상이다.
배치의 변화를 통해 힘(power)을 평등하게 만든다. 서클이라는 단순한 공간 구성이 달라졌을 뿐인데 관계에 전과 다른 기운이 흐른다. ‘하나의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라는 유클리드 기하학까지는 아니더라도 빙 둘러 앉아서 센터피스를 바라보기만 해도 긴장이 풀린다. 동심원을 그리며 싱잉보울(singing bowl)의 파동이 잔잔히 퍼져나간다면 금상첨화다. 한쪽으로만 흐르던 힘이 여러 갈래로 나뉜다. 기운의 방향이 뒤바뀐다.
잘못된 옳은 소리, 정답이라며 ‘확신’하는 순간 바로 오답이 된다는 말일 터, 즉 무수한 해답만 있을 뿐 정답은 없다는. 얼마 전 작고한 채현국 선생의 말씀이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나만 옳고 나머지는 틀리다는 ‘정답’을 찾는 사고야말로 오답인 것이다. 누구나 정의의 해답을 궁구한다. 1990년 하워드 제어(Howard Zehr)박사의 회복적 정의가 정의의 또 다른 해답을 내놓았다. 응보적 정의는 여전히 정답의 자리를 자임하고 있으나 기세는 예전 같지 않다.
회복적 정의는 ‘가해자 중심의 응보적 정의를 통해 정의가 온전하게 실현될 수 있을까?’ 의심했다. 상대적으로 등한시 되었던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에 주목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존재(being)보다는 소유(having)적 삶에 결박된 채 경쟁 교육에 내몰린 청소년들에게 존중과 책임, 공동체라는 가치를 회복하게 하고 있다. 회복적 정의라 쓰고 민주시민교육이라 읽는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적어도 이것 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잘못된 옳은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회복적 정의에 대한 질문들 l 주제글5 l 학교
잘못된 옳은 소리
서영호 전북중 교사
*전주 전북중 교사, ‘회복적 정의는 민주시민교육이다’라고 믿는다.
동료교사들과 교사공동체를 일구며 안전하고 평화로운 학교 만들기에 관심이 많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생각을 하게 된다. 질문을 던진다. 널리 배우고(博學) 절실하게 묻고(切問) 일상생활 속에서 생각(近思)하는 행위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행위다. 질문의 그물망 크기가 깨달음의 크기다. 아인슈타인이 우주에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E=MC²,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뉴턴이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 만유인력. 진화의 역사는 질문의 역사다.
구약성경에서 유래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과잉형벌 금지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齒)만 부러뜨렸는데 왜 목숨까지 빼앗을까?’라는 문제제기에 대한 해답 말이다. 갑자기 주먹을 날려 치아에 손상을 입힌 가해자에게 동태(同態) 이상의 처벌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인권보호정신이 기저에 깔린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응보적 정의를 상징하는 문구가 되었다. 아이러니다.
응보적 정의의 잇몸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근대국가가 등장한 이후 체계화되었고 갈수록 촘촘한 그물망으로 사회를 통제해온 응보적 정의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피는 내가 흘리고 있는데 가해자는 왜 판사에게 반성문을 쓸까? 상처로 인해 여전히 골방에서 괴로워하는데 형기를 마친 가해자는 당당히 대로를 활보하고 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정의의 렌즈를 바꿔야 되는 것 아닌가? 질문하고 있다.
‘잘못은 피해를 낳고 그 피해를 회복하는 것이 정의다.’ 가해자에 대한 응보적 입장에 두었던 무게추를 피해자 회복으로 옮기는 관점(렌즈)의 변환, 정의의 렌즈를 바꾸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진리는 없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는 진리인식에 대한 근본적 위기 상황에서 철학자 칸트의 질문. “진리를 대상(사물)에서 찾지 않고 대상을 보는 인간의 사고체계(선험적 종합판단)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흔들리는 근대철학의 잇몸을 치료하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한 철학자의 집요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었다. 스스로 대견했던지 칸트는 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당신에게 회복적 정의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민주시민교육이라 답한다. 피해자의 회복이라는 체인징 렌즈(changing lenses)는 정의의 법정에서 그간 소외되어 있던 당사자(가해자와 피해자)를 ‘주체’로 뒤바꾼다. 방법은 일방적 질책이 아니라 열린 질문이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자신 입장에서 말해보세요.” 질문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생각하는 지점이 달라지고 태도가 변한다. 자발적 책임, 관계 회복, 공동체 회복은 첫 단추를 잘 끼운 덕분이다. 시작이 반이다.
또 회복적 정의는 교실 내 ‘관심’의 대상을 뒤바꾼다. 말썽부리는 5%보다 조용한 80%에 주목한다. 회복적 생활교육 실천가 브렌다 모리슨(Brenda Morrison)이 일찍이 말했듯이 신뢰 서클, 존중의 약속, 평화감수성 훈련, 회복적 질문 등을 통해 형성된 평화적 하부구조에 바탕한 건강한 또래 압력을 안전하고 평온한 학급을 만드는 데 주요 동력으로 사용한다. 자칫 소수의 악화가 다수의 양화를 구축(驅逐)하기 쉬운 현실에서 매우 효율적인 역발상이다.
배치의 변화를 통해 힘(power)을 평등하게 만든다. 서클이라는 단순한 공간 구성이 달라졌을 뿐인데 관계에 전과 다른 기운이 흐른다. ‘하나의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라는 유클리드 기하학까지는 아니더라도 빙 둘러 앉아서 센터피스를 바라보기만 해도 긴장이 풀린다. 동심원을 그리며 싱잉보울(singing bowl)의 파동이 잔잔히 퍼져나간다면 금상첨화다. 한쪽으로만 흐르던 힘이 여러 갈래로 나뉜다. 기운의 방향이 뒤바뀐다.
잘못된 옳은 소리, 정답이라며 ‘확신’하는 순간 바로 오답이 된다는 말일 터, 즉 무수한 해답만 있을 뿐 정답은 없다는. 얼마 전 작고한 채현국 선생의 말씀이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나만 옳고 나머지는 틀리다는 ‘정답’을 찾는 사고야말로 오답인 것이다. 누구나 정의의 해답을 궁구한다. 1990년 하워드 제어(Howard Zehr)박사의 회복적 정의가 정의의 또 다른 해답을 내놓았다. 응보적 정의는 여전히 정답의 자리를 자임하고 있으나 기세는 예전 같지 않다.
회복적 정의는 ‘가해자 중심의 응보적 정의를 통해 정의가 온전하게 실현될 수 있을까?’ 의심했다. 상대적으로 등한시 되었던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에 주목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존재(being)보다는 소유(having)적 삶에 결박된 채 경쟁 교육에 내몰린 청소년들에게 존중과 책임, 공동체라는 가치를 회복하게 하고 있다. 회복적 정의라 쓰고 민주시민교육이라 읽는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적어도 이것 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잘못된 옳은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