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적 정의에 대한 질문들 l 주제글7 l 학부모
회복적 정의는 공동체를 만든다
한정훈 KOPI 회복적정의교육센터
*회복적 정의와 생활교육을 소개하며, 갈등 당사자의 의사소통을 돕는 일을 한다.
회복적 정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공동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공부하면서 관련한 글을 쓰고 있다.
나만의 독해
“우리의 눈은 ‘주사위’를 최대한 3면밖에 볼 수 없다. 표상적으로 ‘주사위’는 충실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6면을 ‘직관’할 수 있다. 그러나 읽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개시하는 의미를 시시각각 바꾸어가는 ‘책’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독해 가능성을, 우리는 ‘주사위의 보이지 않는 3면’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직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우치다 타츠루, <사랑의 현상학>
나에게 회복적 정의는 우치다가 말한 ‘책’에 가깝다. ‘모두에게 동일한 존재성격을 갖는 그런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상학의 전언에 동의한다. 회복적 정의는 독해 가능성이 독자의 수만큼 확장하는 주제이다. 나는 회복적 정의가 모두에게 어떻게 읽혀야 하는지 말하지 않고, 내가 이해한 회복적 정의를 말할 것이다. 그럼 회복적 정의가 내게 한 질문이 무엇인지 말하게 될 것이다.
회복적 정의를 만나게 된 계기를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은 기독교 평화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참여한2011년 아나뱁티스트 아카데미이다. 여기서 회복적 정의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를 아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KOPI 스텝들과 인연을 맺고, 이후에 KARJ(한국회복적정의협회)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사무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강사로 전환했다.
회복적 정의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강사를 시작한 이후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남에게 간단히 설명할 정도는 알았고, 강사가 되기 위해 따로 공부를 했다. 그러나 회복적 정의를 알고 강사를 시작했다기보다는 일을 하면서 차차 알아갔다고 하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배우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은 가르치는 것일수 있다.
원래 청탁이 왔을 때는 학부모 입장의 글을 써달라고 했다. 하지만 십년쯤 이 운동에 동참해 회복적 정의를 소개하는 일을 했으므로 직업을 고려하지 않은 순수한 학부모 입장은 불가능하다. 학부모이면서 동시에 강사 입장에서 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아들 넷을 키우고 있으니까 학부모로 봐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How much RJ?
기억은 응고화와 재응고화를 거쳐서 장기 기억이 된다고 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회복적 정의와 관계를 형성한 과정을 단계별로 구분해 보면, 합리화와 재합리화를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경험-합리화-재합리화 이렇게 3단계로 정의할 수 있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나만의 독해가 형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받은 첫 번째 질문은 ‘How much RJ?’이다(하워드 제어).
투박하게 말하면 ‘당신의 회복적 정의는 몇 퍼센트인가?’일 텐데, ‘얼마나 회복적 정의가 체화됐는가?’, ‘당신의 삶에 회복적 정의가 얼마나 자리잡고 있는가?’ 등으로 의역할 수 있을 것이다. 회복적 정의를 만나고 긍정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회복적 정의는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 역시 단기간에 신뢰가 생겼다.
강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스텝들끼리 대화하는 자리에서 저 질문을 받고 80%라고 대답했다. 당연히 얼마 후에 그날의 대답을 떠올리며 벽에 머리를 찧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강사라는 직업이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10세 전후의 아들 넷을 키우는 아빠로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강의 때도 농담 삼아 자주 이야기하는데, 이 시절에 가장 두려운 것은 강의 장소에 첫째가 와서 앉아 있는 상상이 었다. 강의를 끝까지 듣고 밖으로 걸어나가는 아이가 “아빠, 좋은 이야기 많이 하네?”라고 말하는 장면이 상상될 때마다 생생한 공포를 느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아는 것과 사는 것의 괴리감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괴리감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 도망치는 것도 방법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How much RJ?”의 합리화이다. 현재 내가 몇 퍼센트인지 들여다보며 수치심을 느끼기보다는 조금씩 실천을 늘려서 장기적으로 우상향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혹은 해야 하는 일 몇 가지를 정하고, 일단은 거기에 집중했다.
회복적 질문
그 중에 가장 공들인 것이 ‘회복적 질문’이다. 특히 훈육 상황의 첫 질문을 중립적 상황 이해로 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반적으로 회복적 질문의 첫 질문을 “무슨 일이야?”로 소개하는데, 나 역시 처음에는 이 질문을 그대로 따라했고, 이후에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내 말투로 자연스럽게 하는 것으로 목표가 바뀌었다.
그러면서 나름의 원칙이 생겼다. “무슨 일이야?”는 무슨 마음으로 물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궁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궁금하다는 것은 판단을 보류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자녀를 훈육해야 할 때,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판단이 끝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궁금하지 않은데 하는 질문은 회복적 질문 이전에 질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회복적 질문의 세 번째 질문은 자발적 책임과 관련이 있다. 좀 투박하게 옮기면 “네가 어떻게 책임질래?”가 될텐데, 이 질문도 곧이곧대로 하기보다는 의미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문제 행동을 한 아이는 자기가 받을 처벌에 집중하며 방어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직면을 통해 책임감을 요구받는 것이다.
‘혼나고 혼나지 않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 행동에 누군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알아야 공감도 가능하다. 여기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알다’이다. 공감과 직면 모두 상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보의 문제’라고 이해했다. “아빠 기분은 어떨 것 같아?” 하고 묻기보다는 “아빠가 이러저러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어”라고 알려주는 쪽을 선택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소개하면, 아이들에게 부부싸움을 들켰을 때, 싸운 이유나 싸움 이후 상황을 설명해 주려고 노력했다. 공동체의 회복 측면에서 치고받은 사람으로 당사자를 좁히지 않고, 영향 받은 사람으로 당사자를 넓혀 보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몇 가지 더 있는데, 회복적 정의에 대한 나만의 독해가 생길 때마다 실천도 하나씩 늘었다고 보면 된다.
공동체 없이도 가능한가?
지금까지 합리화 단계의 질문들을 나눴고, 이제 재합리화 단계를 말할 차례이다. 이를테면, 두 번째 합리화인데, 실은 다른 합리화를 새로 한 것이 아니라 처음 합리화를 수정하고 덮어쓰기를 한 것에 가깝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같다. 합리화의 이유가 된 ‘왜 나는 응보적일 수밖에 없나?’라는 문제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아이 둘이 사춘기가 되어 다른 차원의 훈육이 필요했고, 강사 입장에서는 학교 현장에서 10년 가까이 회복적 정의가 어떻게 소개되고, 소비되는지 지켜본 경험이 누적되면서 고민이 깊어졌다. 아이들의 문제 행동은 훨씬 더 복잡해졌고, 학교 현장의 회복적 정의는 명암이 분명했다.
둘째가 몰래 현질을 200만원 넘게 한 적도 있고, 가지 많은 나무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일년에 한두 번은 불편한 전화를 받는 일도 없을 수는 없다. 집에서 한두 가지 말하는 법을 실천하는 것으로는 성장한 아이가 만든(혹은 겪는) 복잡한 갈등을 다룰 수가 없었다. 좀 더 깊은 회복적 정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훈육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근본적인 철학에 대한 이해와 동의 없이 프로그램 실천 쪽으로 치우치는 것과 회복적 정의를 거의 만병통치약쯤으로 여긴다든지, 어떤 갈등이라도 해결하는 마스터키로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역시 회복적 정의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전달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낀다.
이 글에서 회복적 정의의 더 깊은 이해에 이르게 된 과정을 다 기술할 수는 없지만, 고민의 결과로 얻게 된 마지막 질문을 나눌 수는 있다. 마지막 질문은 “공동체 없이도 가능한가?”이다. 공동체가 완전히 붕괴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포함되어 있고, 공동체 없이는 회복적 정의의 실천이 어렵다는 나름의 결론이 담겨 있다.
언제 회복적 정의로 해야 하나?
집에서 모든 것을 회복적으로 하지 않는다. 모두에 언급한 대로 회복적으로 하고 싶어도 못하는 시절의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모든 것을 회복적으로 해야 한다는 목표 자체가 없다. 이것은 합리화의 결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사고로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마음 한켠에 ‘모든 것을 회복적으로 해야 하나? 그것이 이상적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응보적 정의100%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회복적 정의 100%를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회복적 정의 100%가 바람직하냐, 그렇지 않냐 하는 문제는 글의 주제와는 또 다른 주제로 연결되므로 논외로 할 수밖에 없다.
다만 누군가 부부가 아들 넷, 그러니까 두 사람이 네 명의 모든 생활을 회복적으로 다루는 것은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이미 대답이 정해져 있다.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회복적으로 하려면 그보다 큰 공동체가 필요하다. 뒤집어 말하면 공동체 없이 모든 것을 회복적으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교 상황으로 말하면 회복적 생활교육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교사라고 해도 교사 공동체의 아무 지원 없이 혼자 모든 생활지도를 회복적으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집합 연수에서 만난 교사들은 현장 분위기 때문에 희망적이다. 학교에 곧 회복적인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만 같지만, 실제로 학교에 돌아가면 대부분 회복적인 방식에 관심이 없거나 반대한다.
담임교사건 부모건 혼자 혹은 둘이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훈육을 회복적으로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두 번째 합리화가 필요했다. 그렇게 찾은 결론이 공동체다. 우선 소극적으로 말하면, 회복적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다면, 둘을 병행할 수밖에 없다. 응보적 훈육의 결과에 어느 누구도 만족하지 않을 상황이라면 그때 회복적인 방식을 진지하게 고민하면 된다.
회복적 정의=공동체 형성 과정
스스로 합리화라고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내가 이해하고 전달한 회복적 정의 독해+실천 방법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확신은 없다. 어쩌면 퇴로를 열어둔 소극적 실천일 뿐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늘 상한선보다 하한선이 의미가 있다. 이상주의를 포기한다면, 좀 더 대중적으로 소개될 수 있을 거라는 나름의 계산이 있다.
이상주의를 포기하고, 하한선을 택했지만, 나는 조금 더 길게 보고 있다. 우리 세대에서 확실한 변화가 없더라도 다음 세대 교사와 학부모에게는 문화로 경험되길 바란다. 그래서 내 회복적 정의 독해의 이상에는 늘 공동체가 있다. 회복적 정의는 여럿이 함께 해야 하는 공적인 주제라는 이해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럿의 각자 다른 독해를 견뎌낼 큰 주제라는 신뢰가 있다.
십년 동안 회복적 정의와 관계 맺고 남은 단 한 문장이 이 글의 주제이다. ‘회복적 정의=공동체 형성 과정’이다. 회복적 정의는 공동체를 만든다.
회복적 정의에 대한 질문들 l 주제글7 l 학부모
회복적 정의는 공동체를 만든다
한정훈 KOPI 회복적정의교육센터
*회복적 정의와 생활교육을 소개하며, 갈등 당사자의 의사소통을 돕는 일을 한다.
회복적 정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공동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공부하면서 관련한 글을 쓰고 있다.
나만의 독해
“우리의 눈은 ‘주사위’를 최대한 3면밖에 볼 수 없다. 표상적으로 ‘주사위’는 충실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6면을 ‘직관’할 수 있다. 그러나 읽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개시하는 의미를 시시각각 바꾸어가는 ‘책’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독해 가능성을, 우리는 ‘주사위의 보이지 않는 3면’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직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우치다 타츠루, <사랑의 현상학>
나에게 회복적 정의는 우치다가 말한 ‘책’에 가깝다. ‘모두에게 동일한 존재성격을 갖는 그런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상학의 전언에 동의한다. 회복적 정의는 독해 가능성이 독자의 수만큼 확장하는 주제이다. 나는 회복적 정의가 모두에게 어떻게 읽혀야 하는지 말하지 않고, 내가 이해한 회복적 정의를 말할 것이다. 그럼 회복적 정의가 내게 한 질문이 무엇인지 말하게 될 것이다.
회복적 정의를 만나게 된 계기를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은 기독교 평화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참여한2011년 아나뱁티스트 아카데미이다. 여기서 회복적 정의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를 아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KOPI 스텝들과 인연을 맺고, 이후에 KARJ(한국회복적정의협회)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사무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강사로 전환했다.
회복적 정의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강사를 시작한 이후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남에게 간단히 설명할 정도는 알았고, 강사가 되기 위해 따로 공부를 했다. 그러나 회복적 정의를 알고 강사를 시작했다기보다는 일을 하면서 차차 알아갔다고 하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배우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은 가르치는 것일수 있다.
원래 청탁이 왔을 때는 학부모 입장의 글을 써달라고 했다. 하지만 십년쯤 이 운동에 동참해 회복적 정의를 소개하는 일을 했으므로 직업을 고려하지 않은 순수한 학부모 입장은 불가능하다. 학부모이면서 동시에 강사 입장에서 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아들 넷을 키우고 있으니까 학부모로 봐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How much RJ?
기억은 응고화와 재응고화를 거쳐서 장기 기억이 된다고 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회복적 정의와 관계를 형성한 과정을 단계별로 구분해 보면, 합리화와 재합리화를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경험-합리화-재합리화 이렇게 3단계로 정의할 수 있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나만의 독해가 형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받은 첫 번째 질문은 ‘How much RJ?’이다(하워드 제어).
투박하게 말하면 ‘당신의 회복적 정의는 몇 퍼센트인가?’일 텐데, ‘얼마나 회복적 정의가 체화됐는가?’, ‘당신의 삶에 회복적 정의가 얼마나 자리잡고 있는가?’ 등으로 의역할 수 있을 것이다. 회복적 정의를 만나고 긍정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회복적 정의는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 역시 단기간에 신뢰가 생겼다.
강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스텝들끼리 대화하는 자리에서 저 질문을 받고 80%라고 대답했다. 당연히 얼마 후에 그날의 대답을 떠올리며 벽에 머리를 찧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강사라는 직업이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10세 전후의 아들 넷을 키우는 아빠로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강의 때도 농담 삼아 자주 이야기하는데, 이 시절에 가장 두려운 것은 강의 장소에 첫째가 와서 앉아 있는 상상이 었다. 강의를 끝까지 듣고 밖으로 걸어나가는 아이가 “아빠, 좋은 이야기 많이 하네?”라고 말하는 장면이 상상될 때마다 생생한 공포를 느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아는 것과 사는 것의 괴리감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괴리감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 도망치는 것도 방법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How much RJ?”의 합리화이다. 현재 내가 몇 퍼센트인지 들여다보며 수치심을 느끼기보다는 조금씩 실천을 늘려서 장기적으로 우상향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혹은 해야 하는 일 몇 가지를 정하고, 일단은 거기에 집중했다.
회복적 질문
그 중에 가장 공들인 것이 ‘회복적 질문’이다. 특히 훈육 상황의 첫 질문을 중립적 상황 이해로 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반적으로 회복적 질문의 첫 질문을 “무슨 일이야?”로 소개하는데, 나 역시 처음에는 이 질문을 그대로 따라했고, 이후에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내 말투로 자연스럽게 하는 것으로 목표가 바뀌었다.
그러면서 나름의 원칙이 생겼다. “무슨 일이야?”는 무슨 마음으로 물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궁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궁금하다는 것은 판단을 보류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자녀를 훈육해야 할 때,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판단이 끝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궁금하지 않은데 하는 질문은 회복적 질문 이전에 질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회복적 질문의 세 번째 질문은 자발적 책임과 관련이 있다. 좀 투박하게 옮기면 “네가 어떻게 책임질래?”가 될텐데, 이 질문도 곧이곧대로 하기보다는 의미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문제 행동을 한 아이는 자기가 받을 처벌에 집중하며 방어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직면을 통해 책임감을 요구받는 것이다.
‘혼나고 혼나지 않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 행동에 누군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알아야 공감도 가능하다. 여기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알다’이다. 공감과 직면 모두 상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보의 문제’라고 이해했다. “아빠 기분은 어떨 것 같아?” 하고 묻기보다는 “아빠가 이러저러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어”라고 알려주는 쪽을 선택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소개하면, 아이들에게 부부싸움을 들켰을 때, 싸운 이유나 싸움 이후 상황을 설명해 주려고 노력했다. 공동체의 회복 측면에서 치고받은 사람으로 당사자를 좁히지 않고, 영향 받은 사람으로 당사자를 넓혀 보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몇 가지 더 있는데, 회복적 정의에 대한 나만의 독해가 생길 때마다 실천도 하나씩 늘었다고 보면 된다.
공동체 없이도 가능한가?
지금까지 합리화 단계의 질문들을 나눴고, 이제 재합리화 단계를 말할 차례이다. 이를테면, 두 번째 합리화인데, 실은 다른 합리화를 새로 한 것이 아니라 처음 합리화를 수정하고 덮어쓰기를 한 것에 가깝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같다. 합리화의 이유가 된 ‘왜 나는 응보적일 수밖에 없나?’라는 문제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아이 둘이 사춘기가 되어 다른 차원의 훈육이 필요했고, 강사 입장에서는 학교 현장에서 10년 가까이 회복적 정의가 어떻게 소개되고, 소비되는지 지켜본 경험이 누적되면서 고민이 깊어졌다. 아이들의 문제 행동은 훨씬 더 복잡해졌고, 학교 현장의 회복적 정의는 명암이 분명했다.
둘째가 몰래 현질을 200만원 넘게 한 적도 있고, 가지 많은 나무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일년에 한두 번은 불편한 전화를 받는 일도 없을 수는 없다. 집에서 한두 가지 말하는 법을 실천하는 것으로는 성장한 아이가 만든(혹은 겪는) 복잡한 갈등을 다룰 수가 없었다. 좀 더 깊은 회복적 정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훈육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근본적인 철학에 대한 이해와 동의 없이 프로그램 실천 쪽으로 치우치는 것과 회복적 정의를 거의 만병통치약쯤으로 여긴다든지, 어떤 갈등이라도 해결하는 마스터키로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역시 회복적 정의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전달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낀다.
이 글에서 회복적 정의의 더 깊은 이해에 이르게 된 과정을 다 기술할 수는 없지만, 고민의 결과로 얻게 된 마지막 질문을 나눌 수는 있다. 마지막 질문은 “공동체 없이도 가능한가?”이다. 공동체가 완전히 붕괴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포함되어 있고, 공동체 없이는 회복적 정의의 실천이 어렵다는 나름의 결론이 담겨 있다.
언제 회복적 정의로 해야 하나?
집에서 모든 것을 회복적으로 하지 않는다. 모두에 언급한 대로 회복적으로 하고 싶어도 못하는 시절의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모든 것을 회복적으로 해야 한다는 목표 자체가 없다. 이것은 합리화의 결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사고로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마음 한켠에 ‘모든 것을 회복적으로 해야 하나? 그것이 이상적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응보적 정의100%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회복적 정의 100%를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회복적 정의 100%가 바람직하냐, 그렇지 않냐 하는 문제는 글의 주제와는 또 다른 주제로 연결되므로 논외로 할 수밖에 없다.
다만 누군가 부부가 아들 넷, 그러니까 두 사람이 네 명의 모든 생활을 회복적으로 다루는 것은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이미 대답이 정해져 있다.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회복적으로 하려면 그보다 큰 공동체가 필요하다. 뒤집어 말하면 공동체 없이 모든 것을 회복적으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교 상황으로 말하면 회복적 생활교육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교사라고 해도 교사 공동체의 아무 지원 없이 혼자 모든 생활지도를 회복적으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집합 연수에서 만난 교사들은 현장 분위기 때문에 희망적이다. 학교에 곧 회복적인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만 같지만, 실제로 학교에 돌아가면 대부분 회복적인 방식에 관심이 없거나 반대한다.
담임교사건 부모건 혼자 혹은 둘이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훈육을 회복적으로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두 번째 합리화가 필요했다. 그렇게 찾은 결론이 공동체다. 우선 소극적으로 말하면, 회복적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다면, 둘을 병행할 수밖에 없다. 응보적 훈육의 결과에 어느 누구도 만족하지 않을 상황이라면 그때 회복적인 방식을 진지하게 고민하면 된다.
회복적 정의=공동체 형성 과정
스스로 합리화라고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내가 이해하고 전달한 회복적 정의 독해+실천 방법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확신은 없다. 어쩌면 퇴로를 열어둔 소극적 실천일 뿐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늘 상한선보다 하한선이 의미가 있다. 이상주의를 포기한다면, 좀 더 대중적으로 소개될 수 있을 거라는 나름의 계산이 있다.
이상주의를 포기하고, 하한선을 택했지만, 나는 조금 더 길게 보고 있다. 우리 세대에서 확실한 변화가 없더라도 다음 세대 교사와 학부모에게는 문화로 경험되길 바란다. 그래서 내 회복적 정의 독해의 이상에는 늘 공동체가 있다. 회복적 정의는 여럿이 함께 해야 하는 공적인 주제라는 이해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럿의 각자 다른 독해를 견뎌낼 큰 주제라는 신뢰가 있다.
십년 동안 회복적 정의와 관계 맺고 남은 단 한 문장이 이 글의 주제이다. ‘회복적 정의=공동체 형성 과정’이다. 회복적 정의는 공동체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