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4.3의 세대 전승 민주경찰 문형순 서장에게 배운다 l 한상희 제주 서귀포여중 교감

202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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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세대 전승 민주경찰 문형순 서장에게 배운다

회복적 정의와 역사 이야기
한상희 제주 서귀포여중 교감, '4.3이 나에게 건넨 말' 저자.



한상희: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역사‧사회‧지리‧특수교육을 전공했고, 지역 기반 세계시민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4‧3을 ‘회복적 정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피해‧관계‧책임‧공동체를 회복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와 실천을 지속하고 있다.


 최근 대부분의 사회는 역사 서술 및 교육과 관련된 도전에 직면해 있다. 특히 국내외적으로 분쟁을 겪거나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 인종이나 국적, 종교, 신념, 정치적 이념에 따른 분열을 겪은 사회에서 더욱 그러하다.


 21세기 유럽의 역사교육에 대한 각료회의의 권고안은 역사 연구와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육이 조작, 거짓 증거, 조작된 통계, 조작된 이미지 등 어떤 사건을 정당화하거나 다른 사건을 감추기 위해 한 사건만 비추는 것, 선전의 목적으로 과거를 왜곡하는 것,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을 만들어내는 과도한 민족주의적 시각, 그리고 역사적 사실의 부인이나 누락을 통해 역사를 오용하도록 권장하거나 허용한다면 이는 여러 근본적 가치들과 법령에 위반된다고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역사 교육은 무엇보다도 모든 종류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발전시키는 필수적인 장이 되어야 하며, 여러 민족 간의 화해, 인정, 이해, 상호 신뢰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야 하고, 관용, 상호 이해, 인권, 민주주의와 같은 근본적 가치들을 장려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세계사적인 역사교육의 흐름은 회복적 정의의 철학과도 일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일로 인하여 당사자들이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공감하고, 이를 통해 가해 당사자가 자발적인 책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피해 당사자의 피해가 회복되고 재발 방지가 가능하다.


 본 연재 글은 지금까지 후대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세계사적인 사건을 주제로 악의 평범성이 자행될 때 선의 시민성으로 회복적 정의를 실천했던 인물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이다. 제주 4․3, 광주 5․18, 여순 10․19 항쟁, 대만 2․28 사건, 독일의 홀로코스트, 남아공의 과거사 교육 등을 회복적 정의의 이야기로 접근하고자 한다. 첫 주제는 제주 4․3이다.



  Ⅰ.“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악의 평범성’막아 문형순 경찰서장, “제가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입니다”


  제주4·3 학살극이 잦아들 무렵인 1950년, 제주도민들은 ‘이제 더 이상 희생은 없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군경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무너져버렸던 삶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도내 4개 경찰서, 즉 제주·서귀포·성산포·모슬포 경찰서에 예비검속(豫備檢束)당한 사람들이 수백 명씩 감금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예비검속’이란 아직 어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자의적인 판단만으로 사람들을 구금하는 것을 말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그런 악법이 있었다. 이 악법은 해방 직후 폐지됐으나, 6·25전쟁 직후 불법적으로 재현된 것이다.


  성산포경찰서에도 예비검속으로 수감된 사람이 200여 명에 이르렀는데, 당시 18세였던 강순주(표선면 가시리, 92세) 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강 씨는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이 예비검속 수감자들을 풀어주면서 했던 말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여러분들은 죄가 없습니다. 각자 돌아가서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열심히 사십시오. 이건 제가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입니다.”


  이같은 문 서장의 의로운 판단은 당시 학살 위기에 놓였던 200여 명의 무고한 희생을 막았고, 이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느덧 할아버지 또는 증조할아버지가 되었기에 문 서장이 살린 고귀한 인명은 200여 명이 아니라 4천~5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학살 위기의 광풍의 순간에 문 서장은 어떻게 이런 정의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문형순 서장의 정의로운 판단은 당시 제주 사람들, 제주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어떻게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데 기여하고 있을까?





  6·25전쟁 직후 다른 경찰서에서는 예비검속 학살이 벌어졌다


  1950년 6월 25일 오후 3시경, 내무부 치안국장은 각도의 경찰국장에게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형무소 경계의 건」 이라는 공문을 보내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및 ‘요시찰인’에 대해 예비검속하도록 지시했다. 제주도경찰국은 내무부 치안국의 통첩을 받아 4개 관할 경찰서에 예비검속을 지시하였다.


  제주도 내 경찰서는 구금한 예비검속자들을 개인별로 심사해 A·B·C·D 등 네 등급으로 나눴는데, C급과 D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총살되었다. 경찰의 불법적인 사법권 행사, 즉 등급 분류가 예비검속자 집단학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로 인해 제주도민들은 1948년 11월부터 약 4개월간 벌어졌던 초토화작전 시기의 큰 희생에 이어 또 다시 집단학살당했다. 그런데 다른 3개의 경찰서에서 수백 명씩 대규모 예비검속 희생이 치러졌던 데 비해 성산포경찰서에서는 문형순 서장이 미처 손을 쓰기 전에 벌어진 6명의 희생만 있었다. 문형순 서장의 정의로운 판단의 결과였다.


  문형순 서장은 “제주도에 계엄령 실시 후 예비검속 중인 D급 및 C급 중에서 현재까지 총살 미 집행자에 대해서는 귀 경찰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방첩대)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의뢰할 것”이라는 계엄군의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 의뢰의 건」에 대하여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 직접 써서 공문을 돌려보냈다. 전쟁이 벌어져 계엄령이 선포된 엄혹한 상황에서 목숨을 건 용단이었다.



  Ⅱ. 문형순 서장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 2018 올해의 대한민국 경찰영웅으로 선정


  4·3으로 목숨을 잃은 3만 명가량의 희생 중 군경 토벌대에의한 희생이 약 90%에 이른다. 시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군경이 본연의 임무를 망각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집단 학살을 막았던 문형순 서장은 제주 사회가 극한 상황에 치달을 때 제주 사람들의 회복, 제주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정의로운 판단을 실천한 민주경찰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2018년 8월 대한민국은 문형순 서장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하였다. 같은 해 11월 1일에는 제주지방경찰청 청사 본관 앞에 문형순 서장의 흉상이 세워졌다.


  제주4·3의 희생은 미국과 소련에 의한 남북분단과 세계적인 냉전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발생했다. 이때 제주도의 비무장 민간인들이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고, 평화와 인권이 철저히 유린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분단과 냉전상황이라지만, 어떤 까닭에 이토록 많은 제주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그리고 당시 민간인 학살이라는 명령을 수행하거나 동조, 침묵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민간인 학살은 ‘악의 유전자’를 가진 특별한 사람들이 감행했는가?


  4·3의 가장 큰 비극은 ‘악의 유전자’를 타고난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국가와 사회가 ‘집단 광기’에 빠져있을 때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성찰할 수 없는 사람들이 국가 폭력에 맹목적으로 따름으로써 비극이 초래됐던 것이다.


  밀턴 마이어는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전쟁 범죄는 흔히 히틀러와 그 추종자인 소수의 전횡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배후에는 대중의 동조와 협력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홀로코스트와 같은 악행은 특별한 인격 장애자가 아니라 국가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동조, 침묵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다.


  당시 대다수 독일인은 히틀러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나치 정권의 정책을 지지하였으며, 반유대주의와 반공주의에 근거한 선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비극의 원인을 제공했다. 이는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통해 알려준 것처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사유’, ‘악의 평범성’에서 비롯되었다.




  신흥문관학교를 나온 독립군 출신 문형순 경찰서장… 별세 57년만에 국립묘지 영면



  4·3 당시는 부잣집 아들을 잡아들여 그 목숨을 담보로 많은 부를 축적한 자들도 많았던 시절이지만, 독립군 출신으로서 청렴결백했던 문형순 서장은 퇴직 후 생계를 위해 쌀 배급소 직원을 하거나, 남의 집 단칸방에 얹혀살면서 극장 매표원으로 일하다가 1966년 6월 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동안 문형순 서장은 평안도민회 공동묘지에 잠들다 별세 57년 만인 2024년에 야 국립 제주호국원으로 이장되었다. 4·3과 같이 평화와 인권, 정의가 위협받는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떤 판단과 행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 문형순 서장으로부터 배우고 실천하는 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경찰은 문형순 서장을 2018년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했을 뿐만 아니라, 2020년에는 경찰 총수인 민갑룡 경찰청장이 4·3평화공원을 방문해 위패봉안소 앞에서 과거 경찰의 잘못에 대해 사과했다. 최근 서귀포경찰서는 신규 경찰 연수 때 모슬포에 있는 문형순 서장 공덕비를 참배하는 일정을 만드는 등 민주경찰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문형순 서장이 보여준 정의로운 판단과 실천은 단지 경찰의 영역에서만 선양될 일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는 극악무도한 대량학살은 공무의 형태를 띠고, 공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4.3도 마찬가지였다. 이런상황에서 문형순 서장의 용단과 정의로운 판단은 경찰 뿐 아니라 공직자들과 모든 시민이 본받아야 할 사례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행했던 문형순 서장의 이야기는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회복의 길을 선택할것인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피해가 발생하고 관계가 깨지고 공동체가 위협을 받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문형순 서장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회복적 정의에 동참하기를 권한다. 


  최근 4.3 수형인 재심 법정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수십 년간 희생자들은 통한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유족들의 진술을 들어보면 죄를 입증할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피고인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해 주십시오.’ 이 말은 유족이나 변호사의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검사가 목메어 울먹이면서 무지를 구형하는 놀라운 풍경이다. 이에 판사는 무죄를 선고했다. 국가폭력이 4.3 당시 저지른 잘못에 대해 국가권력인 검사와 판사가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법적인 절차에 따라 무죄라고 말한 것이다. 바로 회복적 법정인 셈이다. 


  반면 75주년 4.3 추념식에선 자신들을 서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가 하면 제주 시내에 4.3을 폄훼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이건 회복적 정의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역사가 남긴 상처는 법적, 제도적 장치 뿐만이 아니라 역사를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관점, 역사에서 배우는 가치와 교훈의 실천을 통해각자 처해진 위치에서 조금씩 진전을 이루다 보면 회복적 역사가 한 발씩 나아가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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