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코스타리카에서 배우는 평화(1) l 강수연 유엔평화대학 석사과정

2025-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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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에서 배우는 평화(1)

강수연 前 2022 NARPI 스텝, 유엔평화대학 석사과정




  

강수연/ 미디어와 사회복지를 공부했고 한국과 캐나다, 비영리와 영리등 다양한 경계를 이으며 커뮤니티 빌딩과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담당했다. 실천적이고 참여적인 평화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 동북아평화교육 훈련원(NARPI) 운영위원이자 유엔평화대학에서 국제평화연구 석사과정을 수학중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배우는 평화


  저는 작년 여름, 코스타리카에 위치한 유엔평화대학(University for Peace, UPEACE)에 입학하여 국제평화연구 석사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분께서 왜 코스타리카로 가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셨는데, 캐나다에서 2년간 난민 지원 활동을 하며 개인적인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시스템과 정책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에 좀 더 거시적인 시각으로 평화를 바라보고,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배우고자 이곳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유엔 평화대학은 1980년 유엔 총회 결의에 따라 설립된 교육기관으로, 평화를 중심으로 한 다학제적 연구와 교육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가장 특별하게 느껴지는 점은 다양한 국가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학습하고 토론하며, 각자의 경험과 관점 속에서 평화를 탐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입학 후 첫 학기에는 ‘파운데이션 코스’를 통해 전공인 평화학과 갈등 연구뿐만 아니라 환경과 개발, 국제법 등의 개론 수업을 접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를 통해 평화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요소와 연결된 복합적인 과정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등 각기 다른 대륙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토론하며, 서로의 배경과 경험을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시각을 점검하고 새로운 시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최근 ‘지속가능개발을 위한 교육’ 수업에서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공존을 고민하는 방식으로 평화의 개념을 확장하는 논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까지는 평화를 인간 사회의 문제로만 생각했다면, 이제는 환경과 생태계 속에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대화는 강의실을 넘어 점심시간, 학생 라운지, 통학 버스 등 일상의 다양한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생각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때로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깨뜨리기도 합니다. 특히, 코스타리카인을 제외하면 모두가 외국인인 환경 속에서 생활하며 학문적 담론을 넘어 실생활에서도 국제 관계의 불평등과 특권의 문제를 직접 체감하게 됩니다. 더불어, 중립국이자 비무장 국가인 코스타리카에서의 경험은 단순한 환상을 넘어서, 그 이면에 대한 질문과 함께 안보와 평화의 개념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만듭니다.





  

  자기 성찰에서 출발하는 평화


  이곳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꼽자면 ‘비판적 사고’와 ‘탈식민지적 관점’, 그리고 ‘자기 성찰’의 중요성입니다. 평화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기존의 학문적 담론을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내러티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성찰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회운동이나 평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신념 속에서 특정한 가치와 관점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지만 실천해내는 과정과 방식이 항상 평화적이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곳의 수업에서는 학문적 논의를 개인적 성찰과 연결하는 과정으로서 성찰문(reflection paper) 작성이 요구될 때가 많습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특정 이론이나 주장이 어떤 맥락에서 형성되었으며, 자신이 지금까지 받아들인 시각이 과연 객관적인 것인지 계속해서 점검하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


  제가 공부해 온 평화학 역시 유럽에서 발생한 세계대전의 경험 속에서 태동했으며, 학문적 담론 또한 서구 중심적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이집트, 인도, 파키스탄, 에콰도르,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닌 활동가, 연구자, 교육자 들을 만나며, 평화에 대한 시각이 얼마나 다층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평화를 바라보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유엔에서 인준한 고등교육 기관이지만, 이곳에서는 유엔을 바라보는 데에도 비판적 사고를 동일하게 적용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설립된 유엔은 이제 내부적으로도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며, 새로운 국제적 과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근본적인 시스템 변화없이 내부에서 대안을 찾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지만, 기존의 전통적인 교육기관과 실천적이며 대안적인 교육기관 사이의 경계에서 평화를 탐구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계를 넘는 평화


  평화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개념 중 하나는 ‘평화는 이분법적이지 않다(non-binary)’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평화를 ‘전쟁이 없는 상태’로 생각하지만, 평화는 단순한 이분법의 개념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다양한 갈등 조정과 협력을 포함하여 실천과 참여를 통해 이루어지는 연속적인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평화를 구축하는 과정에는 수많은 요소가 얽혀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조정하고 조율하느냐에 따라 평화의 형태도 달라질 수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한국의 소식을 접하며 마음이 불안하고 복잡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거리에서 연대하고 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계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보게 됩니다.


  폭력이 아닌 다름을 조율하는 법


  한국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의 상황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납니다. 그날 아침, 저는 평소처럼 학교에 도착해 퍼실리테이션 수업을 들으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신 뉴스를 본 친구들이 다급하게 달려와 소식을 전해 주었고, 그 순간부터 저는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교수님께서 강조하셨던 말씀 하나가 떠오릅니다.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나와 다른 사람과 대화를 이어가고 조율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종종 갈등을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지만, 사실 갈등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 즉 그 해결 과정에 있는 것이죠. 실제로 수업에서 모의 갈등 조정을 해보면, 상대방의 입장과 논리를 이해하고 대화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재자로서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평화는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조율되는 것임을 배웁니다.


  평화학을 공부하면서 폭력적인 콘텐츠에 꽤 많이 노출되는데요. 교수님께서도 학생들이 종종 평화를 배우는 게 아니라 폭력에 대해 배우는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십니다. 폭력과 전쟁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갈등 상황 속에서 나와 다른 상대방을 틀리다고 보고, 폭력으로 대항할 때 어떤 결과들을 초래했는지, 그리고 그 역사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바라봅니다.


  작은 날갯짓의 힘을 믿으며


  어제 현장학습에서 만난 국제기구 직원과의 대화가 계속해서 마음에 남습니다. 우리 세대는 이제 파시즘에 대항해야 하는 세대라는 말씀이었죠. 이런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곱씹다 보니 문득 ‘벌새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거대한 불길 앞에서도 작은 부리로 한 방울의 물을 나르며 최선을 다했던 그 벌새처럼,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날갯짓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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