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회복적 정의는 공동체 형성 과정이다 l 한정훈(KOPI 회복적정의교육원)

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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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정의는 공동체 형성 과정이다
한정훈(KOPI 회복적정의교육원)



 관계형성: 실용적인 계기


 현장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 실천 프로그램은 서클과 대화 모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좀 단순하게 말하면, 서클은 (갈등 상황이 아닌) 일상에서, 대화 모임은 갈등 상황에서 활용한다. 두 가지 모두 앞선 연재에서 이미 소개되었으므로 설명은 생략한다. 이번 연재에서는 이러한 회복적 정의 실천이 회복적 정의 관점에 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더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대화 모임은 갈등을 관계적이고 공동체적으로 푸는 방식이다. 따라서 순서상 관계 형성이 먼저 되어야 한다. 관계가 있어야 관계적으로 문제를 푸는 방식을 이해하고 절차에 동의할 수 있다. 학교 현장에서 학부모나 학생이 회복적 접근을 오해하거나, 이해하더라도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만나서 대화로 문제를 푸는 방식이 있는데, 참여해 보겠느냐고 담당 교사가 학생에게 묻자 "저 이미 손절 했는데요"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있다.


 '절교(絕交)'란 말 대신 '손절'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절교는 서로의 교제를 끊는다는 뜻이고, 손절은 손절매의 약자로 '손해를 보더라도 적당한 시점에서 매도(賣渡)한다'는 뜻이다. 손절은 주식 용어(은어)다. 끊는다는 것은 연결을 전제로 한다. 절교나 손절이나 서로 얼굴을 익힌 사귐을 끊는다는 것일 텐데, 손절에는 더는 손해 볼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서인지 마음에 여지가 남지 않은 완료의 느낌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끊을 수 있을 때 끝맺음 하는 것은 다행인 일이다. 많은 사람이 끊지 못해서 내내 시달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제부터 보지 않는다는 마음가짐만으로 갈등이 종결되느냐 하는 문제다. 관계의 특성상 끊더라도 합의가 필요하고, 갈등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면 서로에게 의미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대화 모임은 없는 여지를 만드는 대화의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매듭짓기 위해서 정리하는, 실용적인 계기에 가깝다.


 정리하면, 갈등을 회복적인 방식으로, 관계적이고 공동체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관계 형성이 준비되어야한다. 쉽게 말하면, 대화 모임을 가능하게 하려면 서클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서클이라는 프로그램을 단순히 모방·반복하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관계 형성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의미다. 대화의 방식을 활용하려고 하면, 갈등을 매듭짓는 실용적인 계기를 마련하자는 말을 오해하지 않을 정도의 관계 형성이 우선적인 조건이다.



 공동체 회복: 새로운 일상으로

 

 회복적 정의가 말하는 관계 형성이 이상적이지 않고 실용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을 밝혔다. 마찬가지로 회복적 정의에서 말하는 공동체 역시 낭만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이를테면, 회복적 정의가 형성/회복하려는 공동체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아름답게 묘사되는 그런 공동체는 아니라는 말이다.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공동체가 회복적 정의를 추구할 수는 있지만, 회복적 정의가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회복적 정의는 일상에서 공동체 형성을 추구하고, 갈등 상황에서 공동체 회복을 추구한다. 어떤 면에서는 회복적 정의 자체가 공동체 형성/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관계의 약화 혹은 공동체성의 부재 상황은 회복적 정의가 극복하려는 조건이다. 회복적 정의의 방점은 '회복'이 아니라 '정의'에 있지만, 정의의 실현 ― 혹은 정의의 회복 ―과 함께 공동체의 형성/회복 노력은 함께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회복은 완료보다 과정의 뜻을 담고 있다. 회복 완료 같은 것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 전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회복적 정의에서 말하는 회복은 피해자가 삶의 주도권을 다시 찾는 것, 곧 '사건 이후의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처음 대화 모임 진행을 맡은 사건의 피해자가 몇 개월 뒤 안부를 묻는 내게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 같아요"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이 나에게 정의의 기준이면서 동시에 회복의 기준이 되었다.


 공동체 형성이 되지 않은 곳에서 당사자는 대화 모임에 참여할 동기부여를 찾기 어렵고, 어렵게 대화 모임의 자리에 나왔더라도 공동체성 여부가 대화의 큰 변수가 될 수밖에 없다. 회복적 접근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 이해는 있으나 기대가 없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지만, 노력만큼 결과가 좋은 일도 아니며 회복적 정의가 집중하는 최우선 과제도 아니다. 회복적 정의가 우선순위를 두고 해야 할 일은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이다.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너무 큰 모험이 되지 않으려면, 직면하는 문화가 밑바탕에 있어야 하는데, 직면의 문화는 공동체 없이 가능하지 않다. 당사자가 대화 모임과 같은 회복적 접근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참여할 때, 그 과정을 함께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대화 모임 이후의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 갈 때, 그 여정을 함께할 사람이 필요하다. 직면의 동기를 제공하고, 회복의 여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연결망이 공동체다.



 가족 집단 컨퍼런스(FGC: Family Group Conference)

 

 관계와 공동체가 어떤 방식으로 적용 가능한지 상상해 볼 수 있도록 뉴질랜드 소년 사법의 중심인 가족 집단 컨퍼런스(FGC)를 간단히 소개하겠다.


 1980년대 뉴질랜드는 늘어 가는 청소년 범죄자를 감당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당시 뉴질랜드는 청소년 범죄율이 높고, 소년 교정 시설 입소율이 세계적으로 높은 국가 중 하나였다. 당시 뉴질랜드의 사법적 접근은 일종의 복지 모델이었고, 수천 명의 청소년이 보호시설이나 위탁 가정으로 보내졌다. 입소하는 소년범 중에는 소수 민족 청소년이 특히 많았는데, 입소 방식이 가족 관계를 약화하므로 원주민 지역사회의 가치와 전통을 무시하는 인종차별적인 면이 있다는 마오리족의 문제 제기가 사회적으로 설득력을 얻어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지역사회 경청 프로그램(process of listening to communities)이다. 이 프로그램은 확대가족(가족과 친지)과 지역사회가 함께 참여하여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방식으로 처벌보다 회복에 목표를 둔다. 이런 변화에 마오리족의 지지가 더해져서 1989년 뉴질랜드 입법부는 '아동·청소년과 가족에 관한 법(The Children, Young Persons and Their Families Act)'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뉴질랜드는 세계 최초로 회복적 정의를 제도화한 나라가 되었다. 이후 개정을 거쳐 FGC는 뉴질랜드 소년 사법제도의 중심이 되었다.


 여러 나라에서 회복적 사법을 실천하지만, 모든 나라가 중심은 응보적 사법이고, 회복적 사법이 이를 보완하는 형태다. 그러나 뉴질랜드는 반대다. FGC는 단순한 만남이나 모임이 아니라 뉴질랜드 소년 사법제도의 중심이다. 과실치사를 포함한 살인 사건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중범죄를 다루며, 가해자가 혐의를 부인해도 고소 내용이 사실일경우 반드시 열린다. 소책자도 번역 출간되었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고하기를 바란다[(앨런 맥래, 하워드 제어, <가족 집단 컨퍼펀스>(대장간)].


 준비와 진행을 위한 일반적인 매뉴얼이 있지만, FGC의 특징 중 하나는 참석자의 문화적·종교적 배경에 맞게 다양한 형식으로 진행 가능하다는 점이다. 당사자의 나이를 고려하여 주안점에 차이를 두기도 한다. 대화 모임에도 분명한 절차가 존재하지만, 진행자는 교조적이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이유는 이런 종류의 대화가 기본적으로 합의라는 의사 결정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FGC는 정의 경험이 관계적이고, 공동체적인 접근으로 가능하며, 제도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다.



 회복적 정의와 공동체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직접 경험이 축소되면서 타인을 협력적 존재로 볼 가능성도 축소된다고 말했다(<투게더>). 갈등 상황에 상대방을 직접 만나는 경우가 점점 줄고 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한국 사회의 공동체성이 낮아진 것이 주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한국에서 회복적 정의가 더 잘 이해되고, 서클과 대화 모임 같은 회복적 실천이 더 잘 활용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의 공동체성이 높아져야 한다.


 대화 모임이나 FGC에 확대가족을 비롯해 지역사회 구성원을 참여시키는 등 여러 사람이 참여해 합의 과정을 거치는 이유를 최대한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말하면, 당사자 둘이 하는 대화보다 무게감이 실리기 때문이다. 둘이 한 약속보다, 네댓 이상이 함께한 약속이 훨씬 부담스럽기 마련이므로 약속이 지켜질 확률도 높아진다. FGC가 제도화되고, 뉴질랜드 소년 사법제도의 중심이 된 이유는 이 사회에 원주민 공동체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없는 회복적 정의 운동은 형용모순이다. 회복적 정의에 관심이 있다면, 공동체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관계나 공동체를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이미 공동체에 속하거나 또 몸담을 공동체를 찾는 사람은 공동체를 낭만화하지 않고, 관계와 공동체의 실용성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길을 찾길 바란다. '회복적 정의=공동체 형성 과정'이다.


한정훈 / 한국평화교육훈련원에서 회복적 정의/생활교육을 소개하며, 갈등 당사자의 의사소통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회복적 정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공동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공부하면서 관련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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