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살림꾼
: AX(AI Transformation) 시대를 사는 회복적 정의 운동가를 위하여
주제글3 AI와 회복적 정의
김종수 생태교육공동체 에듀컬코이노니아 소장
김종수 : 대구 달서구 이곡동을 기반으로 생태교육공동체 에듀컬코이노니아 소장, 사회적협동조합 와룡 교육이사, 마을메이커스페이스 놀삶지기, 함께나누는교회 맴버 목사 역할을 맡고 있다.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초기부터 2021년까지 일을 했고, 지금은 대구 마을교육공동체 와룡배움터에서 생태교육, 퍼머컬처, 전환마을운동 등의 마을평생학습운동으로 마을교육공동체살이를 하고 있다. 2019년 협력주거공동체 마을과 마음이 모이는 집 마읆뜰을 배나무골 3가정과 함께 짓고 재미나게 의미 있게 살고 있다.
들어가면서 - 서클 바깥의 목소리
회복적 정의는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누가 피해를 입었는가?" 이 물음은 수천 년간 지배해 온 응보적 정의의 패러다임을 뒤흔듭니다. 처벌이 아닌 회복, 심판이 아닌 치유, 단절이 아닌 연결. 서클에 함께 앉아 토킹피스를 돌리며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그 자리는, 인간 공동체가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회복하는 삶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서클 안으로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습니다. 인공지능(AI)입니다. AI는 우리가 알던 어떤 기술 도구와도 다릅니다. 단순히 업무를 자동화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AI는 판단하고, 예측하고, 추천하고, 생성합니다. 법원에서는 범죄자들의 재범 가능성을 평가하고, 학교에서는 학생의 잠재력을 판단하며, 고용 시 장에서는 자신의 회사에 맞는 지원자를 선별하고, 의료 현장에서는 병의 진단을 보조합니다. AI는 이미 우리 인간의 관계와 공동체의 살림살이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런 삶 속에서 생태 감수성을 가진 회복적 정의 운동가들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스스로 묻습니다. 생태 감수성이란 단순히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인식이며, 한 존재가 살아가는 것이 다른 존재의 희생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는 전제에서 시작됩니다. 또한 빠른 성장보다 느린 회복을 통해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관점입니다. 이 감수성은 회복적 정의의 정신과 비슷한 측면이 많습니다. 그 비슷한 측면의 뿌리는 한 단어에 있습니다. 오이코스(οἶκος), 곧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태학(ecology)과 경제학(economy)은 모두 이 오이코스라는 어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생태학은 집의 이치를 체계화하고 탐구하고, 경제학은 집의 살림살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두 개념은 집이 아닌 돈의 기준에 따라 서로 상반된 자리에 있습니다. 경제는 생태를 개발하고 착취하는 것이 되었고, 생태는 경제의 언어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분리야말로 회복적 정의의 언어로 말하면 가장 근본적인 관계의 단절입니다. AI 시대는 이 단절에 새로운 층위를 하나 더 얹고 있습니다.
서클 바깥을 잠깐 바라보겠습니다. 강이 흐릅니다. 그 강은 수십 년간 공장 폐수를 받아왔습니다. 강 옆에는 토양이 있습니다. 그 토양은 화학 농약으로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대기가 있습니다. 그 대기는 탄소로 점점 두꺼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서클 안에는 AI라는 새로운 존재가 앉아 있습니다. 강도, 토양도, 대기도, 그리고 AI도 —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함께 사는 지구별 집의 구성원들입니다. 회복적 정의가 진정으로 집 전체의 회복을 지향한다면, 이 모든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함께 다루어야 합니다. AI를 두려워하거나 맹신하지 않으면서, 회복적 정의와 생태 감수성이라는 두 개의 나침반을 손에 쥐고 AX(AI Transformation) 시대를 함께 걸어가는 운동가들을 위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오이코스: 모든 것을 품는 집
다시 말씀드리지만, 생태학(ecology)과 경제학(economy)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둘 다 그리스어 오이코스(οἶκος), 곧 '집'에서 왔습니다. 생태학은 집의 이치를 탐구하고(οἶκος + λόγος), 경제학은 집의 살림살이를 규율합니다(οἶκος + νόμος). 같은 집에서 출발한 두 학문이 오늘날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경제는 생태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시장은 자연을 외부적인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강이 오염되는 비용, 숲이 사라지는 손실, 토양이 죽어가는 대가는 시장의 가격표에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얻는 돈의 이득을 얻는 데 포함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AI 기술의 폭발적 팽창은 이 분열에 세 번째 층위를 더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분리, 삶과 경제의 분리에 이어, 이제 인간과 인간, 인간과 공동체의 관계마저 알고리즘적 중개를 통해 재편되고 있습니다. 집의 분열은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오이코스의 본래 의미 — 집의 살림살이
오이코스는 단순히 건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오이코스는 그 안에 사는 모든 존재들의 관계망을 가리켰습니다. 집의 살림살이(oikonomia)는 이 관계망 전체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한 구성원의 번영이 다른 구성원의 희생 위에 세워지는 것은 좋은 살림살이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집은 강도, 숲도, 토양도, 공기도 함께 사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이제 AI도 그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생태가 파괴되고, 경제가 불의해지고, 관계가 단절되고, 기술이 권력을 집중시킬 때 — 필요한 것은 집 전체의 회복입니다. 회복적 정의는 바로 그 회복의 언어와 실천을 가장 깊이 탐구해 온 운동입니다. 오이코스의 눈으로 AI를 바라보면 곧 중요한 질문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AI는 집안의 특정 구성원의 번영을 위해 설계되었는가? AI의 등장으로 누가 희생을 강요받고 있는가? AI라는 새로운 존재는 집의 관계망을 풍요롭게 하는가, 아니면 파괴하는가? 이 질문들은 AI를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의 관점에서 관계와 살림살이의 문제로 바라보게 합니다.
자연도 피해자가 될 수 있는가 — 그리고 AI 시대는?
회복적 정의가 생태적 감수성을 가진다는 것은 피해자의 범위를 자연과 더불어 지구별 모든 생명으로 범위를 넓히는 것입니다. 뉴질랜드에서는 2017년 왕가누이(Whanganui) 강이 법적 인격을 부여받았습니다. 에콰도르 헌법은 '자연의 권리(Derechos de la Naturaleza)'를 명시하며 자연이 존재하고 재생되며 진화할 권리가 있음을 선언합니다. 문화역사가 토머스 베리(Thomas Berry)는 말했습니다. "지구는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공동체이다. "회복적 정의의 언어로 번역하면, 자연과 지구별의 생명들은 회복적 대화의 당사자들입니다. 이런 관점의 전환은 AI 시대에 더욱 긴박한 의미를 갖습니다. 대형 AI 모델 하나를 훈련하는 데 드는 탄소 배출량은 자동차 한 대가 수십만 킬로미터를 달리는 것과 맞먹습니다. AI데이터센터는 냉각을 위해 이미 물 부족 지역의 물을 대량 소비합니다. AI가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동안, 그 비용과 희생은 지구별 생태계가 치르고 있습니다. "누가 피해를 입었는가?" AI 시대에 이 질문을 진지하게 묻는다면, 피해자 목록에는 자연이 가장 먼저 올라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 질문들은 회복적 정의의 서클을 인간 너머로, 지구별 전체를 품는 관계의 지평으로 확장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2. AI의 민낯을 직시하기
AI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AX(AI Transformation) 시대를 앞에 두고 많은 사람이 묻습니다. "AI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습니다. 생태 감수성과 회복적 정의의 훈련을 받은 운동가라면 먼저 오이코스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AI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별 집의 어떤 구성원에게 이익이 되고, 누가 피해를 입는가. AI는 어떤 관계를 회복시키고, 어떤 관계를 단절시키는가. AI는 집의 살림살이를 돕는가, 무너뜨리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AI는 도구처럼 보이지만 특정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AI 삶문해력의 출발점입니다. AI는 과거의 우리의 데이터로 학습합니다. 그 과거와 현재 안에 있는 모든 삶과 더불어 회복적 정의와는 반대되는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적 불평등 등의 데이터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형사사법 AI 시스템 COMPAS는 흑인 피의자의 재범 가능성을 백인보다 높게 평가하는 편향이 드러나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불의는 알고리즘이라는 옷을 입고 더 정교하게, 더 보이지 않게 작동할 수 있습니다. 또한 AI 기술은 소수의 거대 다국적 기업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AI를 소유한 자와 AI에 의해 대체되는 자 사이의 간극은 빠르게 벌어지고 있고, 더욱 더 각 영역의 불평등화는 깊어지고 있습니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이 말한 구조적 폭력 — 특정가해자의 의도 없이도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해치는 시스템의 작동 — 이 AI를 통해 새롭게 구현되고 있습니다. 생태학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의 종이 생태계의 자원을 독점하여 다른 종들의 생존 기반 자체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AI가 할 수 없는 것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AI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 바로 회복적 정의와 생태 운동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입니다. AI는 서클에서 토킹스틱을 들고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의 침묵 속에 담긴 두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 옆에서 그냥 함께 앉아 있어주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완전히 펼쳐질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를 갖지 못합니다. 생태의 언어로 말하면, AI는 생태계의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지만 땅을 만지는 감각을 갖지 못합니다. 기후 패턴을 예측할 수 있지만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는 지혜를 갖지 못합니다. 한 그루의 나무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는 몸맘을 갖지 못합니다. 오이코스의 진정한 살림살이는 데이터가 아니라 감각으로, 알고리즘이 아니라 관계로, 속도가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불가능의 목록이 바로 회복적 정의 운동가의 대체 불가능한 가치 목록입니다.
3. AX(AI Transformation) 시대 속에 우리의 자세와 구체적 삶
첫 번째 자세: 비판적 수용
AI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AI를 인간성의 적으로 규정하고 거부하는 것, 반대로 AI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회복적 정의 운동가에게 필요한 자세는 이 두 극단 사이의 비판적 수용입니다. 회복적 정의가 가해자를 악마화하지도, 피해를 축소하지도 않듯, AI에 대해서도 같은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생태적 감수성을 가진 삶은 자연의 어떤 요소도 절대적인 선이나 악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불도 물도 맥락에 따라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합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목적으로, 누구의 손에 의해, 어떤 공동체 안에서 사용되는가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집니다. 비판적 수용의 구체적 실천들은 AI 도구를 사용 하기 전에 그 도구가 지구별의 어떤 구성원을 위해 설계되었는지 묻는 것. AI의 결과물이 담고 있는 편향을 읽어내는 것. AI가 제안하는 효율성이 어떤 관계적·생태적 비용을 수반하는지 따져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이코스적 AI 회복적 정의 문해력입니다.
두 번째 자세: 인간 고유성의 의도적 심화
AI가 삶 필요들의 넓이와 속도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시대에, 회복적 정의 운동가의 응답은 깊이를 심화하는 것입니다. 도피가 아니라 전략적 심화입니다. AI가 빠르게 처리할수록 우리는 더 천천히 경청하는 능력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AI가 대규모 데이터를 분석할수록 우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에 더 깊이 머무는 능력을 기릅니다. AI가 효율을 최적화할수록 우리는 비효율처럼 보이는 관계의 시간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퍼머컬처(지속가능한 농삶문화)의 핵심 원리 중에 "관찰하고 상호작용하라"는 이 자세를 잘 표현합니다. 자연을 충분히 오래, 충분히 깊이 관찰하기 전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 이것은 회복적 정의의 깊은 경청과 같은 원리입니다. 생태적 회복이 수십, 수백 년을 요구하듯, 인간 관계의 회복도 충분한 시간과 현존을 필요로 합니다. 이 느린 정의(Slow Justice)의 윤리는 즉각적 결과를 요구하는 AI 시대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며, 지구별 집의 리듬에 맞추어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회복적 정의 운동가는 AI 시대에 느림의 예언자로 한 걸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자세: 연대적 개입
회복적 정의는 갈등을 외면하지 않고 그 한가운데로 들어갑니다. AI 시대에도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AI 기술이 어떻게 설계되는가, 누구의 가치를 반영하는가, 어떤 공동체에 적용되는가를 결정하는 테이블에 회복적 정의 운동가들이 앉아야 합니다. "이 AI 시스템의 피해자는 누구인가? 그들의 목소리가 설계 과정에 반영되었는가? 이 AI의 생태적 비용은 누가 치르고 있는가?" 이 질문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사람이 바로 오이코스의 살림꾼입니다. 생태학이 어떤 변화도 고립되어 일어나지 않음을 가르치듯, AI의 도입은 공동체의 관계 구조 전체를 변화시키고 생태계에 새로운 짐을 지웁니다. 이 연결들을 보는 시스템적 시선으로 AI 정책과 거버넌스 논의에 개입하는 것이 연대적 개입에 아주 중요한 자세입니다.
구체적 삶
첫째, AI를 회복적 정의의 도구로 지혜롭게 활용하는 것입니다. 수십 년간 축적된 회복적 정의 실천의 지혜를 AI를 통해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언어 장벽으로 서클에 참여하기 어려웠던 공동체의 접근성을 AI 번역 도구로 높일 수 있습니다. 생태 피해 데이터를 AI로 분석하여 서클에 앉을 수 없는 자연을 위해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습니다. 도구는 목적에 복종해야 합니다. AI가 오이코스의 관계망을 풍요롭게 할 때만 사용하고, 훼손할 때는 거부하거나 수정하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둘째, 공동체 AI 삶문해력 교육입니다. 기술 교육이 아니라 오이코스 교육입니다. 전문가가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클 형태로 앉아 각자의 AI 경험과 두려움과 기대를 함께 나누는 AI 살롱, AI서클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복적 정의의 방식으로 하는 AI 교육입니다.
셋째, 대안적 AI 생태계 구축을 위한 연대입니다. 오픈소스 AI, 협동조합 방식의 AI 거버넌스, 공동체 소유의 데이터 플랫폼—이런 대안적 AI 생태계를 구축하는 운동들과 연대하는 것입니다. 도넛 경제학이 생태적 한계와 사회적 기반 사이의 안전한 공간을 그리듯, AI 시대의 도넛도 그릴 수 있습니다. 안쪽 경계는 AI가 결코 침범해서는 안 되는 인간 존엄과 관계의 영역이고, 바깥쪽 경계는 AI가 넘어서는 안 되는 생태적 한계입니다. 그 사이의 공간 안에서만 AI는 오이코스의 살림살이에 기여할 수있습니다.
나오면서 _ 지구별 오이코스의 새로운 살림꾼으로
생태학과 경제학이 오이코스에서 출발했듯, 회복적 정의와 AI의 관계도 결국 오이코스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한 구성원의 번영이 다른 구성원의 희생 위에 세워지지 않는 지구별,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며 함께 번영하는 지구별. 그것이 오이코스의 본래 이상이었고, 회복적 정의가 서클에서 실천해 온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수십 년간 회복적 정의 운동가들은 그 지구별의 살림꾼이었습니다. 생태 감수성을 가진 운동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구별의 범위를 인간 너머로 확장했습니다. 서클 바깥의 강과 토양과 대기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의 자리를 서클 안에 비워 두려 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회복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회복으로, 지구별 전체를 품는 관계의 지평으로 넓혀 왔습니다. 이제 그 집 안으로 AI가 들어왔습니다. 토머스 베리의 말처럼, 집은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공동체입니다. 회복적 정의 운동가는 이 재편 앞에서 오이코스의 살림꾼으로서 물어야 합니다. 이 새로운 신기술은 집의 관계망을 풍요롭게 하는가, 아니면 파괴하는가. 집의 어떤 구성원이 피해를 입고 있는가. 그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서클에 함께 앉겠습니다. 이번에는 빈 의자를 몇 개 더 놓겠습니다. 강의 의자, 토양의 의자, 미래 세대의 의자, 그리고 AI 시대의 피해자들의 의자. 토킹피스를 돌리기 전에 그 빈 의자들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큰 공동체의 일원인지를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지구별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큽니다. 그 지구별의 살림꾼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시대가 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지구별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집 안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의 끈으로 굳게 연결된 모든 살림꾼으로, AI 전환 시대에도 변함없이 끈질기고 다정하게 한 걸음씩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기술은 집을 더 크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집을 집답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관계다."
주제글3 AI와 회복적 정의
김종수 생태교육공동체 에듀컬코이노니아 소장
김종수 : 대구 달서구 이곡동을 기반으로 생태교육공동체 에듀컬코이노니아 소장, 사회적협동조합 와룡 교육이사, 마을메이커스페이스 놀삶지기, 함께나누는교회 맴버 목사 역할을 맡고 있다.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초기부터 2021년까지 일을 했고, 지금은 대구 마을교육공동체 와룡배움터에서 생태교육, 퍼머컬처, 전환마을운동 등의 마을평생학습운동으로 마을교육공동체살이를 하고 있다. 2019년 협력주거공동체 마을과 마음이 모이는 집 마읆뜰을 배나무골 3가정과 함께 짓고 재미나게 의미 있게 살고 있다.
들어가면서 - 서클 바깥의 목소리
회복적 정의는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누가 피해를 입었는가?" 이 물음은 수천 년간 지배해 온 응보적 정의의 패러다임을 뒤흔듭니다. 처벌이 아닌 회복, 심판이 아닌 치유, 단절이 아닌 연결. 서클에 함께 앉아 토킹피스를 돌리며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그 자리는, 인간 공동체가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회복하는 삶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서클 안으로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습니다. 인공지능(AI)입니다. AI는 우리가 알던 어떤 기술 도구와도 다릅니다. 단순히 업무를 자동화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AI는 판단하고, 예측하고, 추천하고, 생성합니다. 법원에서는 범죄자들의 재범 가능성을 평가하고, 학교에서는 학생의 잠재력을 판단하며, 고용 시 장에서는 자신의 회사에 맞는 지원자를 선별하고, 의료 현장에서는 병의 진단을 보조합니다. AI는 이미 우리 인간의 관계와 공동체의 살림살이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런 삶 속에서 생태 감수성을 가진 회복적 정의 운동가들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스스로 묻습니다. 생태 감수성이란 단순히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인식이며, 한 존재가 살아가는 것이 다른 존재의 희생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는 전제에서 시작됩니다. 또한 빠른 성장보다 느린 회복을 통해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관점입니다. 이 감수성은 회복적 정의의 정신과 비슷한 측면이 많습니다. 그 비슷한 측면의 뿌리는 한 단어에 있습니다. 오이코스(οἶκος), 곧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태학(ecology)과 경제학(economy)은 모두 이 오이코스라는 어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생태학은 집의 이치를 체계화하고 탐구하고, 경제학은 집의 살림살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두 개념은 집이 아닌 돈의 기준에 따라 서로 상반된 자리에 있습니다. 경제는 생태를 개발하고 착취하는 것이 되었고, 생태는 경제의 언어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분리야말로 회복적 정의의 언어로 말하면 가장 근본적인 관계의 단절입니다. AI 시대는 이 단절에 새로운 층위를 하나 더 얹고 있습니다.
서클 바깥을 잠깐 바라보겠습니다. 강이 흐릅니다. 그 강은 수십 년간 공장 폐수를 받아왔습니다. 강 옆에는 토양이 있습니다. 그 토양은 화학 농약으로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대기가 있습니다. 그 대기는 탄소로 점점 두꺼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서클 안에는 AI라는 새로운 존재가 앉아 있습니다. 강도, 토양도, 대기도, 그리고 AI도 —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함께 사는 지구별 집의 구성원들입니다. 회복적 정의가 진정으로 집 전체의 회복을 지향한다면, 이 모든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함께 다루어야 합니다. AI를 두려워하거나 맹신하지 않으면서, 회복적 정의와 생태 감수성이라는 두 개의 나침반을 손에 쥐고 AX(AI Transformation) 시대를 함께 걸어가는 운동가들을 위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오이코스: 모든 것을 품는 집
다시 말씀드리지만, 생태학(ecology)과 경제학(economy)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둘 다 그리스어 오이코스(οἶκος), 곧 '집'에서 왔습니다. 생태학은 집의 이치를 탐구하고(οἶκος + λόγος), 경제학은 집의 살림살이를 규율합니다(οἶκος + νόμος). 같은 집에서 출발한 두 학문이 오늘날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경제는 생태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시장은 자연을 외부적인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강이 오염되는 비용, 숲이 사라지는 손실, 토양이 죽어가는 대가는 시장의 가격표에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얻는 돈의 이득을 얻는 데 포함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AI 기술의 폭발적 팽창은 이 분열에 세 번째 층위를 더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분리, 삶과 경제의 분리에 이어, 이제 인간과 인간, 인간과 공동체의 관계마저 알고리즘적 중개를 통해 재편되고 있습니다. 집의 분열은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오이코스의 본래 의미 — 집의 살림살이
오이코스는 단순히 건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오이코스는 그 안에 사는 모든 존재들의 관계망을 가리켰습니다. 집의 살림살이(oikonomia)는 이 관계망 전체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한 구성원의 번영이 다른 구성원의 희생 위에 세워지는 것은 좋은 살림살이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집은 강도, 숲도, 토양도, 공기도 함께 사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이제 AI도 그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생태가 파괴되고, 경제가 불의해지고, 관계가 단절되고, 기술이 권력을 집중시킬 때 — 필요한 것은 집 전체의 회복입니다. 회복적 정의는 바로 그 회복의 언어와 실천을 가장 깊이 탐구해 온 운동입니다. 오이코스의 눈으로 AI를 바라보면 곧 중요한 질문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AI는 집안의 특정 구성원의 번영을 위해 설계되었는가? AI의 등장으로 누가 희생을 강요받고 있는가? AI라는 새로운 존재는 집의 관계망을 풍요롭게 하는가, 아니면 파괴하는가? 이 질문들은 AI를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의 관점에서 관계와 살림살이의 문제로 바라보게 합니다.
자연도 피해자가 될 수 있는가 — 그리고 AI 시대는?
회복적 정의가 생태적 감수성을 가진다는 것은 피해자의 범위를 자연과 더불어 지구별 모든 생명으로 범위를 넓히는 것입니다. 뉴질랜드에서는 2017년 왕가누이(Whanganui) 강이 법적 인격을 부여받았습니다. 에콰도르 헌법은 '자연의 권리(Derechos de la Naturaleza)'를 명시하며 자연이 존재하고 재생되며 진화할 권리가 있음을 선언합니다. 문화역사가 토머스 베리(Thomas Berry)는 말했습니다. "지구는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공동체이다. "회복적 정의의 언어로 번역하면, 자연과 지구별의 생명들은 회복적 대화의 당사자들입니다. 이런 관점의 전환은 AI 시대에 더욱 긴박한 의미를 갖습니다. 대형 AI 모델 하나를 훈련하는 데 드는 탄소 배출량은 자동차 한 대가 수십만 킬로미터를 달리는 것과 맞먹습니다. AI데이터센터는 냉각을 위해 이미 물 부족 지역의 물을 대량 소비합니다. AI가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동안, 그 비용과 희생은 지구별 생태계가 치르고 있습니다. "누가 피해를 입었는가?" AI 시대에 이 질문을 진지하게 묻는다면, 피해자 목록에는 자연이 가장 먼저 올라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 질문들은 회복적 정의의 서클을 인간 너머로, 지구별 전체를 품는 관계의 지평으로 확장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2. AI의 민낯을 직시하기
AI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AX(AI Transformation) 시대를 앞에 두고 많은 사람이 묻습니다. "AI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습니다. 생태 감수성과 회복적 정의의 훈련을 받은 운동가라면 먼저 오이코스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AI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별 집의 어떤 구성원에게 이익이 되고, 누가 피해를 입는가. AI는 어떤 관계를 회복시키고, 어떤 관계를 단절시키는가. AI는 집의 살림살이를 돕는가, 무너뜨리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AI는 도구처럼 보이지만 특정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AI 삶문해력의 출발점입니다. AI는 과거의 우리의 데이터로 학습합니다. 그 과거와 현재 안에 있는 모든 삶과 더불어 회복적 정의와는 반대되는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적 불평등 등의 데이터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형사사법 AI 시스템 COMPAS는 흑인 피의자의 재범 가능성을 백인보다 높게 평가하는 편향이 드러나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불의는 알고리즘이라는 옷을 입고 더 정교하게, 더 보이지 않게 작동할 수 있습니다. 또한 AI 기술은 소수의 거대 다국적 기업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AI를 소유한 자와 AI에 의해 대체되는 자 사이의 간극은 빠르게 벌어지고 있고, 더욱 더 각 영역의 불평등화는 깊어지고 있습니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이 말한 구조적 폭력 — 특정가해자의 의도 없이도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해치는 시스템의 작동 — 이 AI를 통해 새롭게 구현되고 있습니다. 생태학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의 종이 생태계의 자원을 독점하여 다른 종들의 생존 기반 자체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AI가 할 수 없는 것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AI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 바로 회복적 정의와 생태 운동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입니다. AI는 서클에서 토킹스틱을 들고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의 침묵 속에 담긴 두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 옆에서 그냥 함께 앉아 있어주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완전히 펼쳐질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를 갖지 못합니다. 생태의 언어로 말하면, AI는 생태계의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지만 땅을 만지는 감각을 갖지 못합니다. 기후 패턴을 예측할 수 있지만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는 지혜를 갖지 못합니다. 한 그루의 나무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는 몸맘을 갖지 못합니다. 오이코스의 진정한 살림살이는 데이터가 아니라 감각으로, 알고리즘이 아니라 관계로, 속도가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불가능의 목록이 바로 회복적 정의 운동가의 대체 불가능한 가치 목록입니다.
3. AX(AI Transformation) 시대 속에 우리의 자세와 구체적 삶
첫 번째 자세: 비판적 수용
AI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AI를 인간성의 적으로 규정하고 거부하는 것, 반대로 AI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회복적 정의 운동가에게 필요한 자세는 이 두 극단 사이의 비판적 수용입니다. 회복적 정의가 가해자를 악마화하지도, 피해를 축소하지도 않듯, AI에 대해서도 같은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생태적 감수성을 가진 삶은 자연의 어떤 요소도 절대적인 선이나 악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불도 물도 맥락에 따라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합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목적으로, 누구의 손에 의해, 어떤 공동체 안에서 사용되는가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집니다. 비판적 수용의 구체적 실천들은 AI 도구를 사용 하기 전에 그 도구가 지구별의 어떤 구성원을 위해 설계되었는지 묻는 것. AI의 결과물이 담고 있는 편향을 읽어내는 것. AI가 제안하는 효율성이 어떤 관계적·생태적 비용을 수반하는지 따져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이코스적 AI 회복적 정의 문해력입니다.
두 번째 자세: 인간 고유성의 의도적 심화
AI가 삶 필요들의 넓이와 속도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시대에, 회복적 정의 운동가의 응답은 깊이를 심화하는 것입니다. 도피가 아니라 전략적 심화입니다. AI가 빠르게 처리할수록 우리는 더 천천히 경청하는 능력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AI가 대규모 데이터를 분석할수록 우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에 더 깊이 머무는 능력을 기릅니다. AI가 효율을 최적화할수록 우리는 비효율처럼 보이는 관계의 시간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퍼머컬처(지속가능한 농삶문화)의 핵심 원리 중에 "관찰하고 상호작용하라"는 이 자세를 잘 표현합니다. 자연을 충분히 오래, 충분히 깊이 관찰하기 전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 이것은 회복적 정의의 깊은 경청과 같은 원리입니다. 생태적 회복이 수십, 수백 년을 요구하듯, 인간 관계의 회복도 충분한 시간과 현존을 필요로 합니다. 이 느린 정의(Slow Justice)의 윤리는 즉각적 결과를 요구하는 AI 시대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며, 지구별 집의 리듬에 맞추어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회복적 정의 운동가는 AI 시대에 느림의 예언자로 한 걸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자세: 연대적 개입
회복적 정의는 갈등을 외면하지 않고 그 한가운데로 들어갑니다. AI 시대에도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AI 기술이 어떻게 설계되는가, 누구의 가치를 반영하는가, 어떤 공동체에 적용되는가를 결정하는 테이블에 회복적 정의 운동가들이 앉아야 합니다. "이 AI 시스템의 피해자는 누구인가? 그들의 목소리가 설계 과정에 반영되었는가? 이 AI의 생태적 비용은 누가 치르고 있는가?" 이 질문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사람이 바로 오이코스의 살림꾼입니다. 생태학이 어떤 변화도 고립되어 일어나지 않음을 가르치듯, AI의 도입은 공동체의 관계 구조 전체를 변화시키고 생태계에 새로운 짐을 지웁니다. 이 연결들을 보는 시스템적 시선으로 AI 정책과 거버넌스 논의에 개입하는 것이 연대적 개입에 아주 중요한 자세입니다.
구체적 삶
첫째, AI를 회복적 정의의 도구로 지혜롭게 활용하는 것입니다. 수십 년간 축적된 회복적 정의 실천의 지혜를 AI를 통해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언어 장벽으로 서클에 참여하기 어려웠던 공동체의 접근성을 AI 번역 도구로 높일 수 있습니다. 생태 피해 데이터를 AI로 분석하여 서클에 앉을 수 없는 자연을 위해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습니다. 도구는 목적에 복종해야 합니다. AI가 오이코스의 관계망을 풍요롭게 할 때만 사용하고, 훼손할 때는 거부하거나 수정하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둘째, 공동체 AI 삶문해력 교육입니다. 기술 교육이 아니라 오이코스 교육입니다. 전문가가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클 형태로 앉아 각자의 AI 경험과 두려움과 기대를 함께 나누는 AI 살롱, AI서클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복적 정의의 방식으로 하는 AI 교육입니다.
셋째, 대안적 AI 생태계 구축을 위한 연대입니다. 오픈소스 AI, 협동조합 방식의 AI 거버넌스, 공동체 소유의 데이터 플랫폼—이런 대안적 AI 생태계를 구축하는 운동들과 연대하는 것입니다. 도넛 경제학이 생태적 한계와 사회적 기반 사이의 안전한 공간을 그리듯, AI 시대의 도넛도 그릴 수 있습니다. 안쪽 경계는 AI가 결코 침범해서는 안 되는 인간 존엄과 관계의 영역이고, 바깥쪽 경계는 AI가 넘어서는 안 되는 생태적 한계입니다. 그 사이의 공간 안에서만 AI는 오이코스의 살림살이에 기여할 수있습니다.
나오면서 _ 지구별 오이코스의 새로운 살림꾼으로
생태학과 경제학이 오이코스에서 출발했듯, 회복적 정의와 AI의 관계도 결국 오이코스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한 구성원의 번영이 다른 구성원의 희생 위에 세워지지 않는 지구별,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며 함께 번영하는 지구별. 그것이 오이코스의 본래 이상이었고, 회복적 정의가 서클에서 실천해 온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수십 년간 회복적 정의 운동가들은 그 지구별의 살림꾼이었습니다. 생태 감수성을 가진 운동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구별의 범위를 인간 너머로 확장했습니다. 서클 바깥의 강과 토양과 대기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의 자리를 서클 안에 비워 두려 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회복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회복으로, 지구별 전체를 품는 관계의 지평으로 넓혀 왔습니다. 이제 그 집 안으로 AI가 들어왔습니다. 토머스 베리의 말처럼, 집은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공동체입니다. 회복적 정의 운동가는 이 재편 앞에서 오이코스의 살림꾼으로서 물어야 합니다. 이 새로운 신기술은 집의 관계망을 풍요롭게 하는가, 아니면 파괴하는가. 집의 어떤 구성원이 피해를 입고 있는가. 그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서클에 함께 앉겠습니다. 이번에는 빈 의자를 몇 개 더 놓겠습니다. 강의 의자, 토양의 의자, 미래 세대의 의자, 그리고 AI 시대의 피해자들의 의자. 토킹피스를 돌리기 전에 그 빈 의자들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큰 공동체의 일원인지를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지구별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큽니다. 그 지구별의 살림꾼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시대가 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지구별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집 안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의 끈으로 굳게 연결된 모든 살림꾼으로, AI 전환 시대에도 변함없이 끈질기고 다정하게 한 걸음씩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기술은 집을 더 크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집을 집답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