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응보적 정의에 따른 대량학살 범죄다 l 김훈태 회복적정의연구소 연구원

202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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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응보적 정의에 따른 대량학살 범죄다



김훈태 / 회복적정의연구소 연구원




나는 병역거부자다. 내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2003년에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당시 미군은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며 이라크를 연일 폭격했다. 한국은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비전투부대라는 명목으로 파병을 결정했다. 감옥에 갈 즈음 나는 평택 대추리에 들어가 미군기지이전반대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도 아니고 제칠일안식일 교인도 아닌 내가 병역을 거부한 이유는 교사로서 사람 죽이는 훈련에 참여할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살인과 교육이 양립할 수 없듯 전쟁과 평화도 양립할 수 없다. 전쟁은 대량학살 범죄로,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할 게 아니라 평화를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두 달째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을 바라보며 극단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다. 절망과 공포 뒤에 끝을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차오른다. 가자지구는 현재 말 그대로 초토화되고 있다. 무장정파인 하마스를 말살하겠다는 극우정치인 네타냐후의 발언은 미국뿐 아니라 주요 강대국의 지원을 받아 현실화되고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등의 정치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의 편에 서겠다고 한 발언을 기억한다. 심지어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마 저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것을 보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어린이와 여성, 민간인이 죄 없이 살해당하고 있다. 짧은 휴전을 끝낸 뒤 이스라엘 점령군이 24시간 동안 살해한 가자 주민은 700명에 달한 다. 폭격과 총격에 이어 식량과 물, 전기와 의약품 공급을 차단해 ‘지구 최대의 감옥’이라는 별칭을 가진 가자지구는 멸절을 경험하고 있다. 


아우슈비츠를 겪었다는 유대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지금의 저 만행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불러오기 충분하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인 살해와 인질 납치에 대한 보복으로 대량학살이 정당화된다면,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고 가혹한 식민 지배를 이어온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보복은 정당한 것인가? 보복은 보복을 낳고, 폭력의 악순환은 결코 폭력으로 끊을 수 없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 서 있는 이스라엘이 지금 당장 전쟁을 멈춰야 한다. 선민의식에 나치로부터 학살당했다는 피해의식까지 더해져 그들은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자신들은 정의롭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종교를 갖고 있든, 어떤 역사를 경험했든, 지금 그들은 아우슈비츠의 나치와 똑같다는 사실만이 진실이다. 





정의로운 전쟁은 허구다 


정의로운 전쟁론, 즉 정전론은 기독교의 역사와 함께한다. 본래 예수의 가르침은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마태복음 26: 52),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마태복음 5: 39) 같이 철저한 비폭력주의였기 때문에 초기 신자들은 로마의 군인이 되기를 거부했고 혹독한 박해를 당했다. 그러나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에 대한 종교적 자유가 인정되고, 그 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이르러서는 제국의 종교가 된 상황에서 전쟁을 합리화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교부 암브로시우스 (Ambrose)가 최초로 정전 개념을 내세웠다. 그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전쟁을 예시로 하여 “전쟁은 악인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심판행위이므로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대에 복무하며 적들과 맞서 싸우는 것은 국가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보호자가 되는 것이기에 어떠한 윤리적 문제도 없다는 논변이 성립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존의 형사사법이 갖는 응보적 정의 관점이 기독교의 정전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의로운 전쟁의 ‘정의’는 응보적 정의인 것이다. 악인의 잘못을 심판하기 위해 사용하는 폭력은 정당하다는 것이 정전론의 요지다. 그런데 그러한 폭력이 전쟁 피해자들의 피해를 회복시킬 수 있을까? 정의로운 전쟁이 공동체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결단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될 수 없다. 회복적 정의의 관점에서 전쟁을 본다면 어떨까? 범죄나 잘못을 관계의 훼손이라고 한다면 전쟁은 관계의 절대적 파괴를 뜻할 것이다. 애당초 전쟁과 같은 대량학살은 정의와 무관하다. 전쟁을 정치적 행위의 연장이라고 주장했던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감안하더라도 전쟁은 정치로써 해결할 문제여야 한다. 전쟁은 정치의 절망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가 사라진 자리에 전쟁이라는 독버섯이 자란다.



회복적 정의에 의한 평화  


이스라엘에서 15년 전 징집을 거부하고 시민단체 ‘뉴프로파일’에서 병역거부자 지원활동을 하고 있는 오르(Or, 여성병역거부자)는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전쟁은 오래전부터 계속 됐다. 휴전만으로 이 갈등을 멈출 수 없다. 더 긴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우선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거대한 무기 실험장으로 사용 하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 둘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만나야 한다. 적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셋째,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 상황을 알아야 한다. 고통과 점령이 얼마나 가혹한지 배워야 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누가 피해자인지를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피해자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이다. 오르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그리고 진실한 사과가 있어야 한다. 단순히 ‘미안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들의 삶을 파괴했고 집을 뺏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이후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인에게 심리 치료와 사회 보장을 제공해야 한다. 일자리 지원도 필요하다. 사회 재건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팔레스타인인이 자유롭게 정당을 만들고, 자신들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응보적 정의가 아닌 회복적 정의가 필요하다. 나아가 회복적 정치 또는 전환적(변혁적) 정치가 필요하다. 이스라엘인들은 현재의 극우정치인들을 방치한 일에 책임이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 역시 마찬 가지다.



참고문헌 

우맹식(2021). 정전론(正戰論)의 도덕교육적 함의에 관한 연구. 교육연구, 80, 185-202. 

손우성(2023.11.20). 이스라엘 병역거부자 “휴전만으로는 오랜 갈등 멈출 수 없어”.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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