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트라우마와 피해자 정당성의 회복 l 이재영 한국회복적정의협회 이사장

2024-04-22
조회수 64


4월의 트라우마와 피해자 정당성의 회복

     









이재영 한국회복적정의협회 이사장 



 매년 4월 중순이 되면 집 앞 과수원에 배꽃이 하얗게 피어오른다. 마치 팝콘을 뿌려놓은 듯 눈앞의 모든 시선을 사로잡는 순백의 배꽃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아름다움을 떳떳하게 만끽할 수 없는 무거움이 마음 한편에 같이 올라온다. 배꽃이 만개하는 4월 중순은 바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기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놓아버리려 해도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수장되어버린 안타까운 이름 304명은 우리 시대를 사는 많은 이들에게 아련함과 비통함 그리고 일종의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 특히 1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속 무거움은 조금도 덜어지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비극적 사건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거의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이 비극의 드라마가 준 충격도 충격이지만, 그 이후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진실을 밝히려는 정의에 대한 노력이 통치집단과 무도한 세력의 온갖 권모와 술수 속에 허망하게 좌절되는 과정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하나 제대로 속 시원히 밝혀지거나 규명되지 못한 채 절망과 체념의 시간이 흘러가버린 것에 대한 답답함과 그에 의한 집단적 분노이기도 하다. 또한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약속이 세월의 유속에 스러져 버린 현실에 대한 자기반성이기도 하다. 결국 세월호 참사와 그 후 10년은 한국 사회에 일종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형성하고 말았다. 


 ‘아직’ 어떤 것도 얻지 못한 생존자나 유가족에게 ‘아직도’로 대응하는 정치권과 사회의 무관심한 모습을 보며 우리가 세월호 참사 10주년을 어떤 관점으로 이해하고 기억해야 할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생긴다. 회복적 정의 관점에서 피해자는 단순히 사법적 처벌과 물질적 변상만을 요구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스스로 피해자가 되기를 결정하는 피해자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피해자는 자신에게 생긴 일이 어떤 일이었는지 정확하게 알고 싶어 하고 알 권리가 있는 존재들이다. 진실에 대한 필요가 누구보다 절대적으로 높은 사람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세월호 참사는 진실규명이 턱없이 부진했거나 무능하게 이뤄진 사건이다. 진실규명에 실패한 사건일수록 피해자의 피해자 인정 과정은 막막해질 수밖에 없다. 소위 피해자는 많은데 가해자가 불분명한 사건이 되어버리면서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을 특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피해자 정당성을 확보하기도 어려워진다. 피해자 인정 과정 또는 피해자 정당 성의 확보는 그 자체로 치유의 길로 들어서는 기반을 마련한다. 1)  [이재영, ‘회복적 정의 – 세상을 치유하다’ (2020, 피스빌딩 출판사), 5장]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두어야 한다.” 이 말은 일본군 종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 공론화 시킨 김학순 할머니의 생전의 말씀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강요에 못 이겨’이다. 김학순 할머니와 다른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들이 평생을 투쟁하며 인정받고자 노력한 것은 자신들이 억울한 피해자임을 알아달라는 매우 기본적인 피해자 인정의 요구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일본의 우익집단과 이들에 경도된 일부 한국의 친일인사들이 계속적으로 공격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따라나선 매춘부이기에 피해자가 아니라는 이들의 주장은 결국 일본군 또는 일본국가 차원의 조직적 범죄행위를 감추고자 하는 비열한 논리이다. 이는 피해자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피해자 정당성을 훼손함으로써 자신들의 책임을 피해가려고 하는 반인륜적 행위이다.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이다. 비난과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통치집단과 정치권은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부정과 은폐, 회유와 떠넘기기를 통해서 자신들의 책임을 피해갈 뿐만 아니라 점차 피해자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파렴치한 일들을 서슴지 않았다. 단순한 교통사고에 왜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냐는 정치인의 발언이나 단식투쟁을 비하하며 폭식투쟁을 하던 반인륜적 만행들이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최근 공영방송 KBS에서 준비하던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가 정부의 눈치를 살피는 윗선에 의해 제작 중단된 사건에서도 이런 피해자 정당성은 계속해서 공격받고 있다. 이런 참사에 대한 정치적 왜곡은 2022년 벌어진 이태원 참사에서도 그대로 재연되었다. 피해자의 얼굴과 이름이 없는 분향소를 설치하고, 망연자실해 있는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마약검사를 위한 부검을 권유한 검찰 때문에 큰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와 같은 대형 참사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한계는, 진실을 규명해야 할 주체가 책임을 져야할 주체와 동일한 상황에서 기존의 책임자(가해자) 규명과 그들의 처벌 중심의 정의 시스템만으로 과연 피해자들의 정의필요(Justice Needs)를 채울 수 있을까라는 점에 있다. 우리의 지난 10년의 경험에서 목도하듯이 피해자들의 어떠한 노력에도 진실 규명은 묘연해질 것이고, 따라서 책임자 처벌도 실제로 이뤄지지 못한 채 피해자들만 고립되고 잊혀져 가는 현실에 맞닥뜨릴 확률이 높다.


 세계적 트라우마 연구의 대가인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피해자(생존자)들이 원하는 정의는 사법이 추구하는 정의의 내용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회적 트라우마가 큰 사건일수록 대중들은 책임자 색출과 처벌, 피해자 변상 등에 대한 요구를 정의를 위한 요구의 전부라고 믿기 쉽다. 하지만 피해자는 더 넒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함께 잘못된 사건(범죄)에 대해 진실한 공감과 공유를 원한다. 왜냐하면 수사를 통한 진실의 공방을 넘어, 피해자와 함께 공유된 잘못에 대한 집단적 공감은 불의한 일에 대한 공동의 비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잘못이 없고 당신들에게 생긴 일은 잘못된 것이라는 집단적 공감을 통해 이뤄지는 피해 자 정당성의 확보는 피해자와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은 공동체에 ‘치유’라는 다음 단계의 문을 열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관심과 초점이 처벌 대상자가 아니라 피해자 자신들에게 맞춰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해자들을 존재 그 자체로 중요하게 여기고 그들을 편견 없이 믿어주는 사회적 메시지가 필수적이다.2) [주디스 루이스 허먼(김정아 역), 진실과 회복 –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위한 정의(2023. 북하우스) ]


 결국 큰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생존자)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지엽적인 사건의 규명과 그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자신들의 피해가 사회정의로 승화되는 긍정적 변화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회적 참사에 대한 인식에서 피해자를 바라보는 사회공동체의 시각이 전환되어야 한다. 피해자는 단순히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대상이 아니다. 피해자는 자신들의 비극적 경험을 통해 좀 더 나은 사회공동체로 변화하 는 데 기여하는 토대가 되길 바라는 사회적 자원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존재적 수용과 정당성 확보를 통해 그들이 스스로 피해자 주기(Victim Cycle)를 벗어나 극단적 죄책감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사랑하여 사회를 위해 의미 있게 기여할 수 있도록 공동체가 이들을 수용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자연스럽게 가해자 색출과 책임 부여에 몰려 있던 초점을 피해자의 필요와 목소리로 전환해나가는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훼손하려고 하는 어떠한 세력에도 명확한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 


 우리는 2024년 4월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이하며 ‘2014년보다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공동체를 만들 고 있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태원 참사와 같은 사회적 비극이 반복되고 있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여전히 대표주자를 바꿔 계속해서 피해자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현실이 참담하게 다가 다. 여전히 ‘가만히 있으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피해자를 사회공동체로부터 고립시키고 분열시키고 있다. 하늘의 별이 된 세월호 피해자들, 이태원 피해자들의 희생이 그저 안타까움과 미안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과거의 사건으로 박제되지 않도록 나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깨어서 고민하고 실천하는 공동체의 자각이 다시 한번 필요한 시기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