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코리안'의 후손으로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것 l 최태순 야마구치조선학교

2024-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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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코리안'의 후손으로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것

'피해자'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 경험에 대하여

최태순 l 야마구치조선학교 중급부 학부모



키워드 : 재일조선인, 피해자, 일본, 부산, 조선학교, 정체성, 마이크로어그레션.


 나는 6월 말에 여섯 분의 일본 사람들과 같이 부산에 다크투어를 갈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고 있다. 2박3일의 기간 동안 온 시간을 써서 ‘이야기를 담은 부산’을 걸을 예정이다. 돌아볼 곳은 국립일제강점박물관, 부산근현대역사 관, 백산기념관, 임시수도기념관,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아미동 비석마을, 우암동 소막마을, 40계단, 초량 이바 구길, 영도다리, 유라리광장, 깡깡이문화마을들이다. 또한 투어일정 중 반나절을 써서 가덕도 대항항 포진지와 외 양포에도 가려고 한다. 내가 왜 이런 투어를 기획했냐고 하면 내 주변 일본분들, 나하고 관련 있는 사람들은 부산에 담긴 아픔, 일본하고의 관련된 것들을 조금이나마 알고 다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분들하고 같이 공부하고, 알아가고, 아파하고, 마음을 공유하고, 그렇게 공감하고 싶어서 이번 여행을 기획했다. 


 코로나가 끝나서 일본사람들이 이전처럼 다시 한국에 많이 다니고 있다. 특히 내가 사는 시모노세키는 부산이 가까워서 부산에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일본사람들에게 부산은 정이 많은 땅이다, 나는 부산을 사랑한다, 나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하고 남포동을 좋아한다든지 광복로에서 뭐 했다든지, 송도나 해운대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곤 한다. “좋았겠네요”하면서 그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면 될 텐데, 그럴 때마다 나는 왠지 기분이 안 좋아졌고, 마음 한 켠에 뭔지 불편한 게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나도 작년 11월에 코로나 이후 난생 2번째로 부산에 가게 됐다. 2018년에 부산을 처음 갔을 때는 아예 한국을 처음 가봤을 때라서 지리적으로 전혀 모른 채 동행자 뒤를 따라서 시장을 구경하고 용두산 공원만을 봤다. 하지만 이번에 갔을 때는 좀 여유가 생겼는지 ‘광복로’라는 거리 이름, ‘백산길’이라는 길 이름, 또 여러 피란마을 이름들,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매우 아렸다. 


 이 거리 이름들에 깃든 이야기를 하나하나 더 알고 싶다. 일본에 돌아와서 여러 자료나 콘텐츠들로 찾아봤더니 여러 가지 근현대 역사이야기들이 끊임없이 계속 나타났고 더 알고 싶은 이야기들로 이어져 매일 밤새 특히 부산의 근현대사공부에 빠져 들어갔다. 조부모님이나 부모님께 들은 이야기, 조선학교에서 어릴 때부터 배우고 알고 왔던 것들하고 이어지기도 하는 과정이어서 더 와 닿았다. 


 올 3월에도 딸이랑 같이 부산에 갈 기회가 생겼다. 그때는 백산기념관에서 해설원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슴이 뭉클해졌고 눈물이 났다. 남포동이 어떤 곳인지 송도가 어떤 곳인지, 부산에 담긴 이야기들을 조금 더 알게도 됐다. 매일처럼 올라오는 SNS, 부산을 다녀왔다는 감성 넘치는 부산여행사진, 심지어는 비석마을에서 브이를 하는 일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왜 매번 기분 한 켠이 안 좋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어쩌면 나는 화가 났던 것 같다. 조금 더 일본 사람들이 근현대역사를 알고 부산 남포동이나 이바구길들을 다녀줬으면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일본은 특히 가해에 대한 역사를 안 가르치고 있고 가해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곳은 전혀 없다. 피해의 역사를 전하는 박물관이나 유물은 있어도 가해의 유물을 담은 곳이 혹시나 현존돼 있다고 해도 “아름다운 역사”로 바뀌어져 새겨지고 기록돼 있다. 예를 들면 야스쿠니신사나 군함도처럼. 


 내가 다니고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조선학교, 그 주변에 있는 옛 조선인거주마을들은 그야말로 지금 현재도 살아 있는 식민지유산이고 상징이기도 한다. 일본정부는 그런 산 증인인 우리 학교와 재일코리안을 없애고 싶어서 틈이 있으면 우리를 배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한국에 가면은 여기저기에 식민지유산들, 박물관들, 기념관들이 있고 그런 내용들이 쓰여진 비들도 매우 많이 있는데, 가해를 모르고 가해에 둔해진 일본 사람들은 그것들이 여기저기에 뚜렷이 나타나 있어도 의문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가해를 인정하지 않고 없애려고 하는 가해에 둔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재일코리안이고, ‘차별’, ‘식민지 지배문화 유산’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일상적으로 많이 접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재일코리안’으로서 한국 국적을 가지고 일본에 살고 있다. 식민지시대(일제강점시대)에 "원하지 않게" 일본에 와서 그대로 살았던 조선인, 지금은 3세에서 4세, 5세, 6세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오래 살고 있는 ‘재일코리안’의 3세이다. 학자들은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강제적' 이유로 집단 이주한 사람들을 '코리안 디아스포라'라고 구분하고 부른다고 한다.1)


 식민지시대 우리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열등한 존재’였고, 기본적으로 ‘인간으로 안 치던 하층 존재’였으며, 일본이 ‘멸시하고 무시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 후 우리 조선은 해방이 됐고, 해방은 그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신분의 해방이며, 일본의 속박과 지배에서 벗어나서 자유와 주권을 획득한 상황이 되어야 하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재일코리안관 즉 또 다른 형태의 멸시와 차별의 시작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발동되고 있다. 2)


 일본 사람들이 흔히, 또는 일본의 몇몇 정치인이나 헤이트스피치를 하는 우익단체, 넷우익 등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차별용어들은 식민지시기와 심지어 해방 후 재일코리안에 대한 멸시와 차별에서 탄생한 말3) 이고 당시 일부 언론이나 정치가의 의도로 유포되던 말이 현재까지도 반복해서 쓰여 유포되어 그게 마치 '재일코리안의 정의'인 것처럼 왜곡된 재일조선인관, 차별과 편견, 멸시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4)


 내가 조선학교를 다니던 80년대, 90년대 당시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은 지금보다 더 힘을 가진 조직이었고, 재일코리안인권운동 분위기에도 상당한 힘과 에너지가 있었다. 어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꼈으며, 단결의 힘은 매우 든든했다. 나는 그런 보호된 공동체인 재일코리안네트워크 안에서 유치원 때부터 본명으로 조선학교를 다녔고, 우리 말, 우리 역사를 배웠으며, 신분을 숨기지 않고 자랐다. 


 선대들이 겪은 차별을 듣고 배웠다. 내가 학생 때도 전철정기통학권 학생 할인이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만 없었고, 일본의 큰 현이나 시가 여는 스포츠공식대회에는 출전 자격이 없었으며, 일본대학수험자격도 못 받았다. 그 차별에 분노하고 저항하고 부모님들이 투쟁하시며 그 권리를 기어코 쟁취해내는 모습도 보고 왔다. 그래서 나같은 경우에는 우리는 일본 사회의 차별 속에서 살지만 부당한 일을 당하면 그때마다 그런 차별들앞에서 굴하지 말고 소리 내서 맞서 싸우고 권리를 우리 힘으로 쟁취하고 지켜 나가자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돌이켜 보니까 그렇게 멸시와 차별 속에서 살면서도 “우리는 피해자이다”라는 말은 내 정체성 안에 없었던 것 같았다. 식민지를 겪으신 1세 조부모님들과 차별에 맞서 싸워 권리를 쟁취해오신 2세 부모님들 덕분에 우리는 선대들이 누리지 못한 '편안함, 평화, 자유'를 누리며 자라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멸시와 차별을 받는데 피해자로 살아왔다고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조선대학교까지 졸업하고, 조선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결혼퇴직 후 처음으로 일본 사회에 발을 들이게 됐던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그렇게 보호된 삶을 누려 온 재일코리안이다. 나는 그게 이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는 걸 택하신 우리 부모님의 사랑의 선택이라고 지금은 깨닫게 됐다. 


 재일코리안들 중에는 이런 일본에서 아예 뿌리를 감추고 일본사람으로 동화하고 귀화하고 아이들을 완전 일본사람으로 키우기를 선택하는 부모도 있다. 큰 도시에 4개교만 있는 민단계 학교를 다니게 하는 부모도 있다. 언뜻 보면 그런 부모님은 우리 부모님과는 정반대인 선택을 한 듯이 보이겠지만 어른이 돼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여기 일본에서 우리 부모들의 이런 선택들은 근본적으로 다 같은 선택이 아닌가 싶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은 다 아이를 키울 때 우리 아이가 이 일본에서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부모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많이 흔들리고 고민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뿌리에 대해 아예 이야기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 아이가 뿌리를 지키고 숨기지 말고 조선학교에 가길 바란다는 선택을 하고, 또 다른 선택들도 그 가정마다 다 다르게 하는데 그 선택들은 다 근본적으로는 다같은 ‘사랑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프고 슬픈 우리 역사적 배경, 지금 우리가 일본에 놓인 위치에 의해 생기는 고민이고 선택들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조선학교에 보내기를 선택했고, 나는 조선학교 보호자가 됐다. 그런데 거기서 처음으로 우리가 ‘피해자’였다는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어머니회 회장을 했을 때 조선학교 엄마로서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해 달라는 이야기를 몇 번 받게 되었다. 2018년 여름에 피스캠프에 같이 참가하고 회복적 정의를 알게 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내가 피해자 측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식했던 것이다. 


 내 안에 ‘피해자’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 것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러면… 가해자는 누구? 그렇게 확실하게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말을 써서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아주 쉽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쁜 일을 안 하고 있는데, 왜 일본정부가 그렇게 우리를 배제하는 걸까? 왜 평소에는 나를 똑같은 일본 사람처럼 보면서 알아보지도 않는데 한복(그 당시 교복이었다)을 입고 다니거나 본명(한국이름)을 말하면 그 순간에 이질적 존재가 되고 이상한 것을 보는 것처럼 나를 보는 걸까? 왜 일본정부가 그렇게 조선인의 역사와 존재를 부정하고 지우려고 할까? 


 우리는 아무런 나쁜 짓도 안하고 똑같이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인데…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이해가 안 되었던 것들... 나는 우리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됐다. 오랜 기간, 인정해야 할 중요한 국면에서도 그때마다 수 없이 여러 번 가해자가 가해를 인정하지 않고, 그 가해가 가해가 아니다라고 하는 나라에서는 가해자가 가해자라는 인식은 물론 피해자가 피해자라는 인식을 못 가지게 되는 건가... 


 사실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할아버지 후손인 나를 보고 ‘우리 나라가 잘못했다’고 미안해 하는 일본사람을 내가 자라는 과정에 한 사람도 만난 적이 없었다. 반대로 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일본에 있는지, 왜 교복으로 한복을 입고 다니는 거지, 뭔가 무서운 사람들이다, 곁에 가지 말자, 사귀지 말자. 이렇게 우리를 특이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아팠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를 ‘자이니치(재일)’, ‘조-센징(조선사람)’이라고 소곤거리며 쳐다보는 시선들을 어릴 때부터 느끼며 살아온 것 같다. 


 보통 남의 것을 빼앗고 훔쳤다면, 남에게 돌이킬 수 없는 가해를 주었다면 그런 자는 가해자이고 그걸 당한 자는 피해자이고 분명히 사과를 받아서 돌려받을 권리가 있는 게 당연한 일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차별이라는 단어가 태어났을 때부터 계속 따라붙으면서 흔한 단어가 돼 있었다. 나도 모르게 우리는 차별받는 게 당연한 존재인데 혹시 또 차별을 받으면 지금까지 해오던 것처럼 또 소리내서 싸워야지 했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처럼 소리를 내도 일본정부는 이번에도 안 들어주겠지만... 그래도 내야지! 늘 이렇게 힘들게 맞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 힘듦은 100년이 되려는 우리의 역사 동안… 특히는 1930년대 후반에 많이 끌려온 1세, 직접 차별을 당한 2세, 그리고 형태를 바꿔서 3세, 4세…로 이어져 가고 있다. 우리 선대들처럼 직접적인 공격을 받아본 적이 없는 세대라 하더라도 차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형태가 변한 거지, 근본적으로 없어지지는 않고 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왜 할아버지가 끌려와서 내가 여기에 살게 됐는지 근현대사공부에도 더 힘을 기울였고, 재일코리안들이 일본에 살면서 당하는 마이크로어그레션5)에 대해서도 공부하면서 내 곁에 있는 일본사람들에게 그것을 더 많이 이야기를 해 나가자는 생각을 하게 되자 내가 서 있는 위치가 더 잘 보이게 됐다. 그리고 이런 우리 재일코리안들의 삶이나 활동이 우리와 또 다른 아픔을 가진 누군가하고의 연대로 이어질 거라고 믿는다. 


 사람들이 정체성과 뿌리를 숨겨야 하고 아파지고 작아지는 사회, 사람들의 인권 감각을 둔해지게 만드는 사회는 풍요로운 사회가 아니다. 재일코리안에 대한 차별은 우리가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이라서 차별받는 게 아니라 일본에 사는 다수파(주류)들이 지니고 있는 뿌리 깊은 문제이고, 조선학교 차별은 인권선진국이라 자칭하는 인권후진 국인 일본의 표출이다.6)


 그리고 이 부당한 재일코리안에 대한 여러 차별 문제는 과거사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일본 속에 있는 큰 문제이다. 부조리를 알아차린 사람은 부조리에 눈을 감지 않는다. 식민지 조선과 해방 후 조선, 그리고 해방 후 우리 재일 코리안문제에 대한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그 부당성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가는 과정은 나한테도 일본분들한테도 정체성을 다시 깨닫게 되는 과정이라고 알고, 오늘도 나는 이 일본땅에서 그들과 함께 많이 나누고 배우려고 한다. 




<참조> 

1) 코리언 디아스포라 : 한반도로부터 강제적으로 분리된 채 해외에서 살아가야 했던 한민족 구성원과 그의 후손. 현재 재외동포 중에서 중국, 일본, 그리고 구소련 국가였던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공화국, 우크라이나, 타지키스탄 등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코리언 디아스포라라고 말할 수 있다. 코리언 디아스포라는 다시 몇 개의 집단으로 구분할 수 있는 데, 대표적으로 조선족, 재일코리언, 고려인, 사할린 한인 등이 있다. (출처: 국립통일교육원[코리언 디아스포라와 통일] 코리언 디아스포라란 누구인가?) 


“… 이처럼 20세기 일제강점기 조선역사에서 대규모 인구유출이 있었고 특히 조선을 지배한 일본으로의 유출이 제일 많았다. 그들 중에는 생존을 위해 이주한 사람도 있었지만, 유학, 독립운동, 징용, 징병, 일본군 '성노예'(위안부)로 끌려가 해방 후에도 어쩔 수 없이 일본에 머물렀던 사람들도 많았다. 이렇듯 재일코리안은 일본 식민지의 상징이자 산물인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대명사라 고 할 수 있다. …” (박미아 청암대 재일코리안연구소 학술연구교수/원광대학교 평화연구소 통일강좌 제8강 ‘한국전쟁 속의 재일 코리안’ 강의내용 중에서) 


2) 1947년 5월 2일, 즉 “전후 일본”의 신헌법이 시행되기 전날, 천황 히로히토(쇼와 천황)의 최후의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이 공포, 즉일 시행되었다. 【1947년 5월 2일 외국인등록령: 대만인과 조선인은 '당분간' 외국인으로 삼는다.】 


그 이튿날인 5월 3일, 일본 헌법이 발효되었다. 재일조선인은 헌법상 보장된 권리의 범위에서 제외되었다. 일본 정부는 일본 헌법이 발효되기 하루 전에 조선인의 일본 국적을 박탈했다. 이것은 일본이 “전후 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일본에 거주(재일)하는 구 식민지 출신자(재일 조선인, 대만인)를 배제하고 관리하는 대상으로서 법제도를 구축하여 가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3) 일본에서 자동카메라를 부를 때 “바카촌 카메라”라 부른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한 용어인데, 이때 ‘촌’이라는 것이 조선인의 준말이다. 즉, 바보(바보는 일본어로 바카라고 한다)도 조선인도 누구나 조작할 수 있는 카메라란 뜻으로서, 조선인은 무지몽매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배어 있다. (임경택/전북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일본인들의 호칭 속에 숨겨 진 한국·한국인의 이미지”에서)


4) 해방 후에도 일본사회에는 ‘조선’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이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었고, 점령국과 피점령국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제3국인'이라는 노골적인 호칭도 등장하였다. 이 말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 그리고 오키나와를 포함하고 있었다. ‘제3국인’은 패전 직후 혼란 상태에 빠져 있던 일본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암시장에서 돈 을 벌기 위해 암약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 되었다. 이 호칭은 2000년 4월에 일본의 대표적 우익 인사인 이시하라 신 타로 도쿄도지사의 발언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육상 자위대 제1사단의 기념식상에서 이시하라는 “현재 도쿄를 볼 때, 불법입국한 많은 제3국인과 외국인이 아주 흉악한 범죄를 반복하고 있다”는 망언을 하였는데, 이는 그 만큼 ‘제3국인’이라는 호칭이 현재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임경택/전북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일본인들의 호칭 속에 숨겨진 한국·한국인의 이미지”에서 


5) ‘아주 작다’는 의미의 ‘마이크로(micro)'와 ‘공격’을 뜻하는 '어그레션(aggression)'의 합성어이다. 직역하면 아주 작은 미묘한 공격. 미국 하버드대 정신과 의사 체스터 피어스가 1970년 흑인에 대한 언어적 차별과 모욕을 묘사하는 용어로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에 여성, 장애인, 빈곤층, 그리고 동양인까지 사회적 약자 전반으로 그 적용 범위가 넓어졌다. 일상생활에서 의도적으로 한 말이나 행동이 아니어도 소수자인 상대가 모욕감을 느꼈다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6) ) 일본정부가 2010년 4월부터 시행한 고교 무상화 정책에서 조선학교(조선 고급학교 10곳)를 배제한 차별사건, 교토 조선 제1초급학교를 우익들이 습격한 폭력사건, 마스크배포 등의 코로나 관련 각종 지원대책에서 조선학교와 유치원은 제외한다는 등 오늘 현재도 조선학교 아이, 학생들의 인권, 교육받을 권리의 침해를 계속하고 있다.(참고사이트: ”차별의 역사” 조선학교와 함께 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http://www.mongdang.org/kr/bbs/content.php?co_id=fact02&ckattemp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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