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한국사회에서의 회복적 정의 l 허현 ReconciliAsian co-director

202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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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한국사회에서의 회복적 정의1)

허현 ReconciliAsian co-director



키워드 : 다문화 한국사회, 다문화 사회, 이웃


1. 우리의 이웃은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은 성서에 나오는 두 개의 가장 큰 계명 중 하나입니다. 


2. 이민/이주(migration)는 인류 역사 속에 늘 있어왔지만, 새 삶을 찾아 이동하는 인구수가 근래와 같은 적은 없었습니다. 자신이 출생한 곳과 다른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2020년 통계로 2억7천2백만 명으로 세계 인구의 3.5%에 달합니다. 이들로 한 국가를 이룬다면 세계에서 5번째로 큰 국가가 됩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3. 한국도 이주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글로벌화, 이주, 유학생, 외국인 노동자 및 국제 결혼의 증가로 인해 단일민족(?) 사회에서 보다 문화적으로 다양한 국가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기준으로 어떤 나라의 전체 인구 중 체류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5% 이상인 경우를 다문화 사회라고 합니다. 한국 법무부 통계를 보면 2023년에 체류외국인의 수가 전체 인구의 4.89%라고 합니다. 아직 수치상 다문화 사회에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미등록 체류자를 포함한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숫자를 고려할 때, 한국은 이미 다문화 사회에 접어들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4. 오늘날 이주자들의 인구통계학적 현상은 모든 국가들 안의 모든 영역에 반향을 일으킵니다. 주민들이 떠나간 지역에서는 노동력 손실, 두뇌 유출(brain drain), 가정생활의 붕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주민들이 유입된 지역에서는 인력 시장, 교육 기관, 의료 시설, 법 집행 등에 예상치 않은 부담을 초래합니다. 다른 언어와 문화적 표현은 정착된 문화 정체성과 마찰을 빚고, 그 결과로 외부에서 유입된 자들에게 자민족중심(ethnocentric)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동시에 최근에 도착한 사람들 앞엔 까칠한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제적 생존과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 및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씨름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5. 그런 난관을 앞에 두고도 사람들이 이주하는 이유는 전쟁, 정치탄압, 인종탄압, 자연재해, 지역경제의 악화, 세계 시장의 압력, 그리고 보다 안락한 삶 때문입니다. 때로는 강압적으로 추방되거나 혹은 안전한 여정을 거치기도 하는데, 어떻게 명명하느냐(labeling)에 따라 그들이 처한 환경을 알 수 있습니다. 


● “난민(Refugee)”은 강제로 이주되어 새로운 땅에서 자신의 힘으로 혹은 국제 기구의 도움으로 피난처를 찾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 “이민자(Immigrants)”는 난민과 대조적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 조국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단기간 혹은 장기간 머무를 곳을 찾아 법적인 절차를 따라 국경을 넘습니다. 그러한 절차를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면, 합법적인 테두리 밖에서 이주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 “국내이재민(internally displaced persons)”은 난민이나 이민자들과 같은 이유로 이주를 하지만, 국경을 넘어가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6. 이중 난민 위기는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인도주의적 문제 중 하나입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UNHCR)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 세계적으로 1억1천만 명 이상의 강제 이주민이 있으며, 그 중 3천6백 만명 이상이 난민입니다. 이들은 전쟁, 박해, 인권침해, 환경재해 등으로 인해 고국을 떠나 안전과 더 나은 미래를 찾고 있습니다. 난민은 수용국에서 법적인 장벽,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고립, 문화 적응 등 수많은 도전에 직면합니다. 때문에 수용국에는 난민들의 통합을 위해서 법적 보호, 고용, 교육, 의료, 사회보장 서비스를 망라하는 포괄적인 정책이 필요합니다. 


7. 한국의 글로벌 난민 위기에 대한 대응은 어떨까요? 2023년 기준으로 지난 30년 동안 한국은 1,439명이 난민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난민 수용률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은 편인데, 이는 너무 경직된 신청 절차와 대중의 저항 때문입니다. 2018년 예멘 난민들이 제주도에 도착하면서 이민 및 난민 정책에 대한 전국적인 논쟁이 촉발되었습니다. 인권과 인도적 의무를 강조하는 소수와 국민의 안전,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 경제적 영향을 우려하는 다수의 첨예한 대립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난민 신청의 공정하고 효율적인 처리를 보장하고 난민 통합을 위한 적절한 지원을 제공하는 법적이고 제도적인 프레임워크를 강화해야 하는 필요가 대두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교육 캠페인을 통해 인권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정당한 우려를 다루는 균형 잡힌 접근 방식으로 제 3의 길을 찾아내는 문화 형성이 시급하다는 점도 드러났습니다. 


8. 미국의 경우 난민을 포함한 이민 관련 토론은 종종 다음 두 논점 중의 하나로 시작됩니다. 첫째는 국경을 유지 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국가의 안전과 국민을 보호할 권리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미 제정된 이민법을 지키는 것을 강조합니다. 법집행 절차를 강조하면서 이민자들의 법적 지위에 관해 답을 찾는 것으로 논점이 축소됩니다. 두 논점은 매우 중요하지만, 토론의 출발점이 이들을 가해자와 범법자로 규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집을 떠난 이민자들(합법, 불법을 포함)의 필요에 대해 고려할 여지를 남기지 못한 채, 토론이 처음부터 수세적인 분위기로 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주자들이 그 사회의 문화를 풍부하게 하여 새로운 관점을 도입할 수 있고 혁신을 촉진할 수 있다는 순기능이 토론에서 배제되기 때문입니 다. 결국 국경과 법이 이민관련 논의의 출발점으로서 적절한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9.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는 이러한 상황에서 다양한 형태의 이주자들을 포용하기 위해 제시된, 사회 내의 다문화적 배경을 인정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이념적이고 정책적인 접근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정부도 다문화주의의 일환으로 다문화 가정을 지원하기 위해 언어 교육, 문화 프로그램, 사회복지 서비스 등을 포함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2008년에 제정된 다문화가족지원법은 다문화 가족의 복지를 증진하고 그들의 한국사회 통합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제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대다수의 다문화 가정이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인한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다문화주의는 난민의 적응과 복지에 기여하고 수용국의 문화를 풍부하게 하지만, 문화적 차이를 강조해 소수자를 더 고립시키거나 백인 기득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유럽의 지도자들도 다문화주의의 실패를 선언했습니다. 다문화주의의 보완/대안으로 제시된 상호문화주의(interculturalism)는 문화가 상호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한다고 보며, 종교나 전통보다는 학교나 직장 등에서 일상적인 열린 대화와 소통을 통한 상호작용을 중시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시민으로서의 공통 문화를 강조합니다. 


10. 상호문화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웃 개념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제가 속한 메노나이트나 그의 사촌격인 아미쉬는 역사적으로 사회와 격리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이웃의 경계를 협소하게 그었었지요. 마치 200여 개의 언어 그룹이 살고 있는 LA 메트로폴리탄에 살면서도 한국인들끼리만 모이고 챙기며 사회시스템이나 이웃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노예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흑인을 노예 삼고 착취하고 살해하는 악한 시스템(정사와 권세)에 대해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의 이웃이라는 경계에는 흑인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메노나이트 안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서 남녀불평등이나 인종차별 등의 구조적인 문제에도 비폭력 저항 (non-violent resistance)하는 메노나이트들이 많아졌습니다. 무저항(non-resistance)노선이 바뀐 것 이지요. 물론 아직도 처음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주창했던 무저항으로 가야 한다는 분들도 많이 계시긴 합니다만, 비폭력 저항을 통해 사회정의에 참여하는 것이 이웃 사랑이라는 흐름이 대세인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내용의 핵심은 신학의 변화라기보다는 삶의 자리에서 이웃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1. 이러한 이웃 사랑의 근간은 생명에 대한 경외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고대의 세계관에서 왕이 자신들의 형상을 세워 자신들의 왕권을 세뇌시키고 더나아가 자신들이 신의 형상이라 하는 시대에 특권층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창세기 저자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정착민들과 권력자들만이 아니라 이민자들과 사회적 약자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웃 사랑을 생각할 때 든든한 기초를 놓아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가 마땅히 그러해야 할 바(what ought to be)라고 할 때, 정의의 궁극적 목적은 가해자-피해자-공동체가 치유되어 마땅히 그러해야 할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를 근간으로 합니다. 반대로, 생명을  시하는 모든 체제, 국가, 종교, 문화, 사회는 생명을 지으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불의입니다. 정의에 대한 회복적 관점에서의 이해는 우리의 세계관을 바꿀 정도로 본질적인 것이고,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12. 그러므로 다문화 사회로 들어가고 있는 한국사회가 이미 겪었고, 지금 겪고 있으며, 또 앞으로 겪게 될 제반의 문제와 피해에 있어서도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정의(Restorative Justice)가 사회 전반의 본질적인 회복을 위해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처벌보다는 치유와 화해를 강조하는 회복적 정의는 공동체 조화와 집단적 책임이라는 한국의 전통적 가치와 잘 맞기에 다문화 및 난민 이주 상황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불의 속에서도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1)다문화 사회에서는 문화집단 간의 대화와 이해를 촉진해 공동체 간의 다리를 놓고 집단적 복지를 증진시키며, 2)난민의 경우에는 고국과 수용국에서 겪은 트라우마와 불의를 해결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인정받을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함으로써 치유 과정과 통합을 도울 수 있고, 3)난민과 수용 공동체 간의 긴장을 해소해 상호 이해와 협력을 촉진할 수 있습니다.


13. 나와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살아온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교육과 사회구조적 변화가 필요한데, 이러한 포괄적 틀을 제공하기 위해 회복적 정의와 상호문화주의를 연결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통합적 접근 방식의 일례로 이민자, 난민, 지역 주민을 함께 모으는 지역사회 기반 프로그램의 개발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미 실행 중인 분들도 많이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차별, 괴롭힘, 사회적 배제 문제를 다루기 위해 지역사회 센터와 학교 등의 교육 시스템은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는 다문화 역량을 키우는 활동, 대화와 협력을 장려하는 상호문화 교육 등을 회복적 정의와 연계해 상호문화적 공동체 서클과 피해자-가 해자 조정, 회복적 대화와 워크샵 등의 커리큘럼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열린 대화/소통, 공감, 그리고 상호 이해를 위한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참가자들이 경험을 공유하고 우려를 표현하며 공통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14. 회복적 정의와 상호문화주의의 건강한 조합을 위해서는 법적, 제도적 지원 또한 필수적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삶은 사회와 국가 시스템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문제들에만 함몰되어 있으면, 우리들의 그 모든 수고와 애씀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20년 전 한국에 있을 때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한 적이 있는데요. 그들을 제가 돌보아야 할 이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이분들을 도와드린다고 해도 결국 법과 제도적 장치가 바뀌지 않으면 이들의 삶은 곰팡이가 가득 핀 방 세 칸에 20명이 몰려 사는 그 자리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 법과 제도와 정치와 경제 시스템과 문화를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정부가 회복적 정의 실천과 상호문화적 이해를 촉진하는 정책과 법률을 제정하도록 촉구할 수 있습니다. 법률이나 정책의 개혁은 난민과 다문화 가족을 포함한 모든 커뮤니티 구성원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보호받으며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법 관계자, 교육자, 그리고 지역사회 지도자에게 회복적 정의 원칙과 상호문화적 역량에 대해 교육을 해야 합니다. 


15. 다문화 정책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문화적 다양성의 축하를 넘어 차별과 불평등의 심층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회복적 정의와 상호문화주의의 조합의 목표 중 하나는 다양한 사회에서 갈등과 긴장의 근본 원인이 되는 구조적 불평등의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효과적인 난민 통합을 위해서는 법적 보호, 사회적 지원, 공공 교육이 함께 가야 하는데, 이민자와 난민이 교육, 고용, 사회 서비스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좋은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경제적 격차, 차별, 그리고 사회적 배제를 다루는 것이 포함됩니다. 모든 분야에서 차별을 배격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문화를 조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는 서로 공감하며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줄이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렇게 근본 원인을 해결함으로써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고 새로 유입되는 이주자들에게 생존할 수 있는, 그리고 궁극적으로 번영할 수 있는 자원과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16. 정리하자면, 한국에서 회복적 정의, 이주, 상호문화주의의 교차점은 동시에 도전과 기회가 됩니다. 회복적 정의 원칙을 상호문화적 접근과 조화시켜서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면서도 사회적 결속을 촉진하는 효과적인 전략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지역사회 기반 프로그램, 법적 및 제도적 지원, 그리고 구조적 불평등 해결 노력은 이 통합 프레임워크의 핵심 구성 요소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은 모든 개인이 자신의 문화적 배경에 상관없이 가치 있고 존중받는 포용적이고 공정하며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 제가 속한 기독교 관점에서 정리하자면, 신약에서 환대란 뜻의 헬라어는 ‘필로제노스(φιλόξενος)’라고 하는데요. 앞부분의 ‘필로’라는 단어와 뒷부분의 ‘제노스’라는 단어를 합성해서 만든 단어입니다. ‘필로’는 형제애 혹은 ‘형제 같이 사랑하기’라는 뜻이고, ‘제노스’는 이방인stranger 혹은 이주자immigrant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제노포비아’라는 말은 이민자 혹은 이방인에 대한 혐오를 말하는데요, 앞부분의 ‘제노’가 바로 ‘제노스’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대란 단어 필로제노스는 ‘이방인/이민자들을 자신의 형제를 사랑 하듯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친분이 있는 사람의 방문을 환영하고 대접을 잘 해 주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죠.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고 형제로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8. 더 나아가서, 당시 이방인이나 이주자는 상황에 따라서 원수 혹은 적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필로제노스라는 말은 원수 혹은 적을 형제와 같이 사랑하는 의미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환대란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기독교의 핵심 사상에 가까이 들어가는 것이죠. 산상수훈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급진적/근원적 환대(radical hospitality)는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요, 실천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웃이 바뀌었습니다. 다른 문화에서 우리를 찾아와 이웃이 된 사람들을 환대해 좋은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는 삶을 꿈꿔봅니다. 


19.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으로 글을 맺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1) 이 글은 사)한국회복적정의협회 회복적정의 연구소의 요청으로 필자가 2023년 2월에 복음과상황에 기고했던 <타인을 환대하는 세 가지 방법>과 몇몇 곳에서 강의했던 <다문화/다인종 사회 이민자로 더불어 살기>의 내용을 가져와 회복적 정의와의 연결점을 찾으려는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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