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적 사법이야말로 피해자 권리의 진정한 보장
임수희 서울남부지방법원 부장판사
출처 : 법률저널(http://www.lec.co.kr) 2023.09.13 11:36
피해자학(Victimology)이 20세기 중반에 비로소 등장한 것만 봐도 인류가 피해자에 관심 갖고 주목하기 시작한 역사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해자학이라는 용어를 1956년에 처음 쓴 벤자민 멘델존은 그 때문에 ‘피해자학의 아버지’가 되었는데, 피해자를 그 유책성의 정도에 따라 책임 없는 피해자, 책임이 조금 있는 피해자, 가해자와 동등한 책임 있는 피해자, 가해자보다 책임이 큰 피해자, 책임이 가장 큰 피해자, 그리고 상상의 피해자로 유형화하였다.
이러한 피해자 유형론에는, 일반적 피해자 유형(아동, 여성, 노인 등)과 심리적 피해자 유형(우울증 환자, 탐욕스러운 사람 등)으로 나눈 한스 폰 헨티히를 필두로 하여, 잠재적 피해자성과 일반적 피해자성을 나눈 헨리 엘렌베르거나 피해자의 책임과 역할 관점에서 유형론을 제시한 스티븐 섀퍼 등 여러 학자들이 뒤를 이었다. 레아 다이글은 이와 같이 피해자학이 보는 피해자의 역할을 피해 촉발(Victim precipitation), 피해 용이(Victim facilitation), 피해 도발(Victim provocation), 세 개의 범주로 나누어 파악한다(이민식 역, 레아 다이글의 『피해자학』).
피해자에 대한 관심은 반가우나, 범죄 발생에서 피해자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다 보면, 마치 피해자가 오히려 범죄자를 만들어 낸다고 말하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한다. 범죄가 발생하고 범죄 피해가 확대되는 데에 피해자의 몫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학문적 연구 결과로 뒷받침되는 사실적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피해자에 대한 비난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내포할 위험성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피해자에 대한 논의가 위와 같은 범죄원인론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고 피해자 보호 대책의 측면도 있다. 오늘날 피해자학은 피해의 정도·종류·원인·결과, 형사사법 시스템의 피해자에 대한 대응, 사회서비스와의 관계, 피해예방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피해자 보호를 위한 입법 역시 20세기 중반 즉, 1963년 뉴질랜드, 1967년 캐나다, 1976년 독일, 1984년미국 등 여러 선진국에서 앞다퉈 이뤄져 왔고, 1985년 유엔에서 <범죄 및 권력 남용 피해자를 위한 정의의 기본원칙선언(Declaration of Basic Principles of Justice for Victims of Crime and Abuse of Power)>이 채택되어 이후 각국의 피해자의 권리 및 보호, 지원 법제 구축의 근간이 되고 있다. 사법접근권과 공정한 대우, 원상회복(Restitution), 배상(Compensation), 지원(Assistance)에 관한 피해자의 권리와 국가의 의무를 골자로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7년 헌법에 형사피해자 재판절차진술권과 범죄피해자 구조청구권이 들어왔고, 1990년대 들어서면서 성폭력범죄 피해자, 가정폭력범죄 피해자에 대한 특별 보호 입법이 이루어졌으며, 2005년에 범죄피해자보호법이 제정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피해자 지원을 위한 기관도 현재 전국에 총 60개의 범죄피해자지원센터와 강력범죄 피해자들을 위한 총 17개의 스마일센터가 있다. 요컨대, 피해자는 뒤늦게 관심의 ‘대상’이 되어 범죄 발생과 관련 연구의 대상이나 구조(보상, 배상) 및 보호와 지원의 대상이 되어 왔고, 그러한 것들이 개별적으로 ‘권리화’되기도 하여 점차 피해자의 권리 보장이라는 영역이 구축되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바로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 패러다임 하에서의 피해자를 보는 시각이다. 즉 회복적 사법은 범죄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 범죄자와 피해자, 그리고 관여된 사람들과 공동체 모두가 함께 그 문제를 장래를 향해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말하는데, 전통적 형사절차에서 피해자가 단지 국가 뒤에 ‘증거’로 머물던 객체적 지위에 있었다면, 회복적 사법은 피해자를 위와 같은 주체적 지위로 적극적으로 끌어낸다. 나아가 실질적이고 통합적인(민사, 형사, 행정 등 국가 편의적으로 나뉜 분절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피해 회복을 추구하며, 공동체 내에서의 회복과 통합의(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도) 관점에서 피해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즉 회복적 사법은 피해자와 피해자학을 재조명하면서 피해자의 지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럼으로써 피해자가 무슨 대단한 신분 상승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범죄 피해를 당한 ‘피해자’가 아니라 권리와 존엄성을 가진 한 개인으로서 가정과 사회 내에서 통합적인 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을 회복할 인간의 지위를 되찾는 것뿐이다. 그것은 원래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고 가지고 있어야 할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피해자도 인간이라는 것과 인간의 존엄성을 갖는다는 것, 이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 피해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는 첫 출발이 될 것이다.
회복적 사법이야말로 피해자 권리의 진정한 보장
임수희 서울남부지방법원 부장판사
출처 : 법률저널(http://www.lec.co.kr) 2023.09.13 11:36
피해자학(Victimology)이 20세기 중반에 비로소 등장한 것만 봐도 인류가 피해자에 관심 갖고 주목하기 시작한 역사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해자학이라는 용어를 1956년에 처음 쓴 벤자민 멘델존은 그 때문에 ‘피해자학의 아버지’가 되었는데, 피해자를 그 유책성의 정도에 따라 책임 없는 피해자, 책임이 조금 있는 피해자, 가해자와 동등한 책임 있는 피해자, 가해자보다 책임이 큰 피해자, 책임이 가장 큰 피해자, 그리고 상상의 피해자로 유형화하였다.
이러한 피해자 유형론에는, 일반적 피해자 유형(아동, 여성, 노인 등)과 심리적 피해자 유형(우울증 환자, 탐욕스러운 사람 등)으로 나눈 한스 폰 헨티히를 필두로 하여, 잠재적 피해자성과 일반적 피해자성을 나눈 헨리 엘렌베르거나 피해자의 책임과 역할 관점에서 유형론을 제시한 스티븐 섀퍼 등 여러 학자들이 뒤를 이었다. 레아 다이글은 이와 같이 피해자학이 보는 피해자의 역할을 피해 촉발(Victim precipitation), 피해 용이(Victim facilitation), 피해 도발(Victim provocation), 세 개의 범주로 나누어 파악한다(이민식 역, 레아 다이글의 『피해자학』).
피해자에 대한 관심은 반가우나, 범죄 발생에서 피해자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다 보면, 마치 피해자가 오히려 범죄자를 만들어 낸다고 말하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한다. 범죄가 발생하고 범죄 피해가 확대되는 데에 피해자의 몫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학문적 연구 결과로 뒷받침되는 사실적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피해자에 대한 비난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내포할 위험성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피해자에 대한 논의가 위와 같은 범죄원인론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고 피해자 보호 대책의 측면도 있다. 오늘날 피해자학은 피해의 정도·종류·원인·결과, 형사사법 시스템의 피해자에 대한 대응, 사회서비스와의 관계, 피해예방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피해자 보호를 위한 입법 역시 20세기 중반 즉, 1963년 뉴질랜드, 1967년 캐나다, 1976년 독일, 1984년미국 등 여러 선진국에서 앞다퉈 이뤄져 왔고, 1985년 유엔에서 <범죄 및 권력 남용 피해자를 위한 정의의 기본원칙선언(Declaration of Basic Principles of Justice for Victims of Crime and Abuse of Power)>이 채택되어 이후 각국의 피해자의 권리 및 보호, 지원 법제 구축의 근간이 되고 있다. 사법접근권과 공정한 대우, 원상회복(Restitution), 배상(Compensation), 지원(Assistance)에 관한 피해자의 권리와 국가의 의무를 골자로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7년 헌법에 형사피해자 재판절차진술권과 범죄피해자 구조청구권이 들어왔고, 1990년대 들어서면서 성폭력범죄 피해자, 가정폭력범죄 피해자에 대한 특별 보호 입법이 이루어졌으며, 2005년에 범죄피해자보호법이 제정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피해자 지원을 위한 기관도 현재 전국에 총 60개의 범죄피해자지원센터와 강력범죄 피해자들을 위한 총 17개의 스마일센터가 있다. 요컨대, 피해자는 뒤늦게 관심의 ‘대상’이 되어 범죄 발생과 관련 연구의 대상이나 구조(보상, 배상) 및 보호와 지원의 대상이 되어 왔고, 그러한 것들이 개별적으로 ‘권리화’되기도 하여 점차 피해자의 권리 보장이라는 영역이 구축되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바로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 패러다임 하에서의 피해자를 보는 시각이다. 즉 회복적 사법은 범죄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 범죄자와 피해자, 그리고 관여된 사람들과 공동체 모두가 함께 그 문제를 장래를 향해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말하는데, 전통적 형사절차에서 피해자가 단지 국가 뒤에 ‘증거’로 머물던 객체적 지위에 있었다면, 회복적 사법은 피해자를 위와 같은 주체적 지위로 적극적으로 끌어낸다. 나아가 실질적이고 통합적인(민사, 형사, 행정 등 국가 편의적으로 나뉜 분절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피해 회복을 추구하며, 공동체 내에서의 회복과 통합의(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도) 관점에서 피해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즉 회복적 사법은 피해자와 피해자학을 재조명하면서 피해자의 지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럼으로써 피해자가 무슨 대단한 신분 상승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범죄 피해를 당한 ‘피해자’가 아니라 권리와 존엄성을 가진 한 개인으로서 가정과 사회 내에서 통합적인 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을 회복할 인간의 지위를 되찾는 것뿐이다. 그것은 원래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고 가지고 있어야 할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피해자도 인간이라는 것과 인간의 존엄성을 갖는다는 것, 이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 피해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는 첫 출발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