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으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l 임종진(사진치유자)

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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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으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임종진 / 사진치유자, (주)공감아이 대표



월간 말, 한겨레신문 등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다. 기자시절 국내외 여러 지역의 고단한 상황에 놓인 이들을 취재하면서 사진의 효용성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후 언론사를 떠나 캄보디아에서 국제구호기관 자원활동가로 2년 가까이 머물면서 '사람이 우선인 사진'이라는 자기 관점의 척도를 세웠다. 이후 예술가의 미학적 철학을 좇기 보다는 타인의 고통이 스민 현장이나 현실적 고단함이 묻어있는 상황 안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우선적으로 찾아내는 것에 큰 의미를 두어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다큐멘터리와 사진심리치료의 경계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치유적 사진행위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중에 너무도 가슴 아픈 소식을 접했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생존자였던 한 소년이 스스로 삶을 멈췄다는 소식입니다. 당일 친구들과 이태원을 찾았다가 모두 숨지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그 소년.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이랍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가여운 영혼을 위해 두 손을 모아야 했습니다. 그날 이후 이 여린 소년이 감당해야 했을 낮과 밤을 생각해 봅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얼마나 아프고 힘겨웠을까. 눈물이 납니다. 한없이 가슴이 무너지고 죄스럽기만 합니다. '어른'이라는 범주에 들어앉은 채 안전한 세상 하나 이루지 못한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지 얼마 안 되어 10대 청소년들에게 편지를 하나 쓴 적이 있습니다. 오래도록 칼럼을 기고해 온 청소년 대상 한 매체였습니다. 늘 꿈과 희망에 대한 내용을 담아왔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에 간절함을 덧대여 힘을 주어야 했습니다. 혹시 모를 상실감에 좌절하면서 세상을 향한 가슴을 닫을까 어떻게든 위로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 단어의 나열들이 위로는커녕 허물스런 충고로 들릴까 내심 마음까지 졸여야 했습니다. 편지 내용 일부를 축약해 여기에 다시 옮깁니다.



시린 겨울이 오기 전 이 가을을 서럽게 보냅니다.


나의 어린 아들딸들이,

당신의 친구와 언니 오빠들이 한순간에 아무런 남김 하나 없이 삶을 멈추었습니다.


158명.

10월 29일이라는 날짜.

그리고 2022년 가을.


이제 숫자로 기억하게 될 그 귀한 생명들의 흔적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어른들이 혹여 당신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면,

가만히 있지 말아요.


고고한 척 유난 떠는 어른들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한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말아요.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다면,

당신 생각과 마음 흐름대로 살펴도 됩니다.


누군가를 끌어주고 싶다면,

마찬가지로 당신의 생각과 마음 흐름대로 하면 됩니다.


바로 지금의 당신이 옳습니다.

.........




이 편지를 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가슴이 터질 듯 무겁습니다. 그동안 수도 없이 목도했던 여러 재난과 사건 사고, 외국의 전쟁터에 이르기까지. 당시 현장에서 보고 절망했던 모든 기억들이 선연히 되살아나 숨을 조이는 느낌입니다. 스스로 삶을 멈춘 그 소년의 또래 친구들, 기껏해야 하나둘, 더해봐야 서너 살 위 누나와 형들이 한꺼번에 숨을 잃어야 했던 그 날. 이태원 좁은 골목길의 숨 막히는 상황들이 고스란히 눈에 보이며 묻어둔 아픔들을 들추었습니다. 망울을 틔우지도 못하고 사라진 꽃들을 보고 이제 틔워내려는 작은 꽃망울들마저 눈에 밟혔습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했고 위로도 조언도 못되는 글 몇 줄이나마 건네는 것으로 이 귀한 어린 꽃들을, 그리고 나를 살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무언가를 우리는 찾아야만 하니까. 살아야 하니까.


오랜 기억 하나를 숨죽이며 떠올립니다.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2분. 서울시 서초동 소재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습니다. 엉성한 설계에 따른 부실공사로 사망 502명, 실종 6명, 부상 937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한 어이없는 사고였습니다. 당시 갓 수습 딱지를 뗀 초보 언론사 사진기자였던 나는 꼬박 2박 3일 동안 낮과 밤을 지새우며 현장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아수라장 그 자체인 참사현장은 초보 사진기자가 감내하기에는 완벽히 불가능했습니다. 현장을 기록해야 한다는 기자로서의 의무감과 구조활동에 뛰어들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구가 계속 충돌했습니다.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을 위한 세트장인 것 같은 비현실적인 실제 속에서 내 감정을 스스로 통제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면서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사람, 사람들이었습니다. 붕괴된 건물 콘크리트에 깔린 채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 사람을 살리고자 목숨을 건 구조 대원들,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차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망연자실 서 있는 시민들. 각자 다르게 보이던 그들의 얼굴과 표정은 참사 후 30여 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선연하게 분리된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남긴 충격과 혼돈은 내게도 가볍지 않았습니다. 직접적인 피해당사자가 아니었음에도 한동안 가슴 속에 파고든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심리적 내상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였음을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습니다. 이는 당시 그리고 이번 이태원참사까지, 안전한 자택 거실에 앉아 TV 화면을 통해 상황을 지켜봤던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심리적 위축감으로 인해 가슴을 쓸어내린 경험이 있거나 당장 자기 가족의 안위를 생각하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허망하게 스러져간 어린 영혼들 앞에서 우린 허물어지게 됩니다. 


언론사를 그만두고 사진심리상담가의 길을 걷고 있는 지금의 나는 삼풍백화점 참사를 현재의 이 길로 이끈 결정적인 순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무작정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사건 이후 피사체로서의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이 가진 감정의 흐름을 훨씬 주목하기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카메라 앞에 선 이들의 내면에 드리워진 감정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성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때 부터였던 듯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다는 것. 도리어 인간의 존재 자체가 지닌 생명성의 의미에 더 몰입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맞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던 당찬 포부는 조용히 사그라들었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곁에 가까이 서서 그의 얘기를 들어주는 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사진을 대면의 도구로 삼아 자신의 내적 감정과 마주하도록 권하는 사진치유자로서의 삶, 살아남은 이로서의 내 몫이라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을 만났습니다. 특히 304명이 사망·실종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치유자로서의 내 자리가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한 사건이었습니다. 안산의 한 치유센터를 오가며 자식을 그리고 형제자매를 잃은 유가족들을 만나며 많은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애초 연민의 감정이 없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을 딛고 보니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사회적 호명 넘어 한 사람으로서의 존재성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진실규명과 상실의 아픔은 분명 가장 살펴야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개별적 존재로서 한 사람이 가진 삶 양식의 회복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계절의 변화에 들뜬 감정도 느끼거나 여행의 설렘도 가져야 합니다. 예쁘게 화장을 하거나 연인을 만나 산뜻한 데이트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맛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부터 치유프로그램을 통해 만나온 모든 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80년 5·18광주민주항쟁 고문피해자, 7·80년대 조작간첩사건 고문피해자, 가정폭력피해청소년, 미혼모, 성매매여성, 북향민, 발달장애인 … 등등. 이렇게 명사화된, 부르기 꺼끌스럽게도 어느 특정한 사건의 ‘피해자’로 호명·인식된 이들의 곁이었습니다. 더불어 이 모든 여정은 당사자들과 함께 심리적 내상에서 벗어나 치유와 회복의 여정을 함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떠어떠한’ 피해자라는 사회적 인식의 껍질을 벗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당사자들 자신이 얼마나 귀한 영혼인지를 스스로 재인식하는 시간이기를 무척이나 바랐습니다. 이러한 치유자로서의 여정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 대한 공감과 존중입니다. 공감과 존중의 첫걸음은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숨을 잃은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애도의 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이름을 갖습니다. 더불어 사람을 포함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이름을 통해 그 존재를 인정받고 스스로 인정합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를 존중하는 것이고, 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를 증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이름을 알고자 하는 행위 자체가 그 누군가의 존재를 공감하고 존중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연을 맺고 싶을 때 제일 먼저 이름을 묻게 됩니다. 누군가 편의를 위해 자기의 이름이 아닌 숫자로 된 번호나 ‘어이!’ 같은 용어로 부를 때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이 누군가를 부를 때도 똑같습니다. 어린아이들도 인형마다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애착감정을 드러냅니다. 여덟 살짜리 내 늦둥이 딸아이는 최근에 선물 받은 인형의 이름을 ‘포미’라고 부르며 항상 껴안고 꿈나라에 듭니다. 


이제 다시 10·29 이태원 참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담하기 그지없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부실한 사회안전망으로 인해 꽃다운 청춘 158명의 숨이 멈춘 명백한 사회적 참사입니다. 참사의 정황 못지않게 이후에 벌어진 정부의 후속 대처능력 또한 심각하게 허술했습니다. 비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살아남은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에 대한 진심어린 보호조치 또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공감과 존중에 기반을 둔 필수적인 안전장치들이 그렇게 발휘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정치권의 권력놀음만 난무했습니다. 아직도 그렇습니다. 


가슴 아픈 시민들의 자발적 애도의 걸음이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사 이후 두 달 가까이 지나는 동안 희생자 158명의 이름과 얼굴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정부가 부랴부랴 세운 추모식장에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위패와 영정사진 하나 놓이지 않았습니다. 애도의 자리에 하얀색 국화꽃만 난무했습니다. 조화를 보며 안식을 비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모두가 울고 분노했습니다. 장례식장에 영정사진과 이름을 올려놓는 것도, 묘지 비석에 이름과 더불어 태어난 시와 숨을 거둔 시를 새기는 것도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애도의 첫걸음입니다. 살아 있었음을, 숨을 내쉬며 살았던 고귀한 생명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 문입니다. 망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애도의 시작입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애달픈 이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새롭게 천막 추모식장을 세웠습니다. 이곳에서야 겨우 우리는 그 아름답던 얼굴과 이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정부의 조치들에 피가 끓지만 그나마 애도의 숨을 틔울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추모식장을 열며 스무 살 자식을 잃은 어미의 절망 가득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정부의 명단 비공개 방침을 ‘은폐’라고 어미는 절규했습니다. 명단을 공개하는 이유를 모두가 기억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참사가 발생하지 않게 하라는 희생자 부모로서의 명령이자 요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가슴으로 새겨들어야 할 목소리입니다. 자식을 키우는 아빠의 입장에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존재성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나는 이 어미의 목소리에 백번 천번 동의를 합 니다. 


희생자들과 아무런 인연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158명 모든 희생자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보며 두 손을 모으고 싶습니다. 이름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기억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위의 글은 [RJ 저널 22-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독자 투고는 누구나에게 열려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research@karj.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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