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적 정의에 대한 질문들 l 주제글6 l 교육청
내가 만난 회복적 정의
우민서 대구시교육청 생활인성교육과 파견교사
*대구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는 대구시교육청 관계회복지원단 파견교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현장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2013년 12월의 어느 날,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아이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아이는 같은 반 친구들의 괴롭힘으로 힘들어했고 당시 생활부장이던 나는 학교폭력대책위원회를 열어 조치를 내렸다. 나는 아이가 학급에서 편안하게 잘 지내고 괴롭힌 친구들은 반성하며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었고 그 아이는 결국 전학을 갔다. 전학 가던 그 아이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첫 번째 질문 “피해 발생 전 학교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열쇠는 무엇인가?”
그때부터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다녔다. 교육청에서 여는 연수에서는 학폭사안 처리절차와 학부모 대응방법에 대해 알려줬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해 1월 제주도로 간 생활부장 연수에서 처음으로 회복적 생활교육에 대해 듣게 되었지만 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의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학급에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정서선별대상에 해당되는 아이들을 모아서 봉사동아리를 만들어 한 달에 한 번씩 학교 밖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아이들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려고 노력했다. 또, 학교 안에서 다양한 채소와 고구마, 감자 등을 키우며 삼겹살도 구워 먹고 샌드위치도 만들어서 선생님들, 부모님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또한 위센터로 상담을 보내고 학급에서 요청이 오면 직접 아이들 상담도 실시하였다. 3년 동안 소소한 갈등은 있었지만 학폭사안으로 접수되는 사안 없이 평화롭게 보냈다.
생활지도에는 자신감을 가지고 옮겨간 학교의 첫해, 내가 교직을 계속 유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든 한 해를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학급을 안전하고 평화롭게 운영할 수 없었다. 또다시 깊은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맞이했다.
두 번째 질문 “어떤 문제상황에서도 학급을 안전하고 평화롭게 경영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만약 내가 이 어려움을 휴직으로 해결한다면 다시 학교로 돌아올 자신이 없을 것 같아 그 한 해를 그냥 버텼다. 당시 나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잘 먹지 못했다. 여기에서 포기한다면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처한 어려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예전에 들었던 회복적 생활교육을 떠올리고 그 단어가 들어 있는 연수란 연수는 모두 찾아 들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온 정성을 다 쏟은 위기학생 외에 내가 놓친 80퍼센트의 아이들을 보게 되었다. 그 아이들과 공동체를 다지는 여러 활동을 하면서 문제행동을 하는 아이들의 변화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점차 내가 찾아온 해답이 ‘회복적 생활교육’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2019년 다시 생활부장 업무를 맡게 되면서 내가 꿈꾸는 학교와 학급을 만들고 싶었다. 학생들에게 또래중재자교육과 학급별 서클 수업 4시간, 교사 연수 5회기, 학부모 연수 5회기를 실시하고 학교 전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즉시 개입해서 학폭사안으로 가기 전에 대화모임으로 조정하였다. 학급담임과 생활부장을 동시에 했지만 힘든 줄 모르고 한 해를 보냈다. 그 해 전근을 앞둔 나에게 교감선생님께서 “선생님같이 회복적 생활교육을 하는 분을 생활부장으로 초빙하고 싶은데 추천해 주실래요?”라는 말을 듣고 ‘학교 차원의 시스템 구축이나 관리자의 노력없이 한 사람이 하는 활동이 과연 지속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세 번째 질문 “학교 차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급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2020년 연구년 교사로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급과 학생에 대한 지원활동을 하면서 학급과 학교의 문제는 단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학교 안의 지원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2022년 학교에서 가장 힘든 아이들의 담임이 되었다. 담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있기에 학교 관리자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내가 감당하고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홀로 힘든 아이들을 감당하면서 80퍼센트의 아이들과 함께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어려움은 있었지만 보람도 있었던 한 해였다. 만약 내가 회복적 생활교육을 배우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과 어려움을 겪는 학급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학교 안에 구축되어 있었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학교를 떠나 교육청으로 파견을 가는 결정을 했다. 내가 늘 느꼈던 한계에 대한 해답을 찾아서 학교 안에서 할 수 없다면 학교 밖에서 지원하는 시스템을 좀 더 구축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공동체를 도와줄 길을 찾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회복적 생활교육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한계에 대한 도전이고 선배 교사로서 후배들을 위한 나의 소명이라고 믿었다.
네 번째 질문 “교육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공동체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2023년 교육청으로 파견을 오면서 관계회복지원단 학교지원프로그램의 형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왜냐하면 학교 관계자의 인식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의 프로그램이 단지 일회성의 학교 면피용으로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 관계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으면서 그들이 참석해야 되는 필요성을 설득시키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우리들은 학교 관계자가 문제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문제아로 보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아이로 보며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에 눈물 흘리는 순간을 같이 했다. 긴 시간 진행되는 대화모임에 참석한 교감 선생님이 대화모임이 끝나고 “다음번에 학교에 갈등이 있으면 연락할게요. 그때 와 주실 수 있죠?”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 진행자들의 노력으로 학교의 만족도도 높아지고 학교지원프로그램도 정착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 프로그램의 정착을 위해서 수많은 갈등에 직접 나가서 갈등도 조정하고 나머지 파견업무도 처리하면서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서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 같다. 진행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내년에도 이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염려가 있다.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관계회복지원단에 대한 홍보와 내년도에 연구년과 파견으로 오시는 선생님께 먼저 갈등조정역량강화를 위한 연습에 도움을 드리는 것이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후배님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갈 것이라는 믿음도 있다.
내가 지금까지 이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만큼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열정이 가득했던 시절에 실시한 대화모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화모임이 끝나고 석양이 비치는 어스름한 복도를 재잘재잘 이야기하면서 걸어가는 엄마와 아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은 그들의 삶에 기여했다는 나에 대한 감사와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던 그들에 대한 감사였다. 아직도 그 순간의 감동을 나는 기억한다.
만약 누군가 이 길을 걸어가라고 나에게 말했다면 나는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옳다고 믿었고 체험했기에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걸어왔던 것 같다. 회복적 정의는 내가 쉽고 편안하게 가고 싶을 때도 이 신념과 다른 길을 걸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다. 앞으로의 나의 삶도 이 철학과 함께 할 것이다. 이제 3개월 남은 파견업무를 잘마무리하고 학교로 돌아가서 아이들과 함께 소소한 즐거움을 나누면서 회복적 정의의 철학이 내 삶에 스며든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해 준 단짝인 너(회복적 정의 철학)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회복적 정의에 대한 질문들 l 주제글6 l 교육청
내가 만난 회복적 정의
우민서 대구시교육청 생활인성교육과 파견교사
*대구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는 대구시교육청 관계회복지원단 파견교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현장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2013년 12월의 어느 날,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아이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아이는 같은 반 친구들의 괴롭힘으로 힘들어했고 당시 생활부장이던 나는 학교폭력대책위원회를 열어 조치를 내렸다. 나는 아이가 학급에서 편안하게 잘 지내고 괴롭힌 친구들은 반성하며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었고 그 아이는 결국 전학을 갔다. 전학 가던 그 아이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첫 번째 질문 “피해 발생 전 학교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열쇠는 무엇인가?”
그때부터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다녔다. 교육청에서 여는 연수에서는 학폭사안 처리절차와 학부모 대응방법에 대해 알려줬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해 1월 제주도로 간 생활부장 연수에서 처음으로 회복적 생활교육에 대해 듣게 되었지만 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의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학급에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정서선별대상에 해당되는 아이들을 모아서 봉사동아리를 만들어 한 달에 한 번씩 학교 밖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아이들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려고 노력했다. 또, 학교 안에서 다양한 채소와 고구마, 감자 등을 키우며 삼겹살도 구워 먹고 샌드위치도 만들어서 선생님들, 부모님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또한 위센터로 상담을 보내고 학급에서 요청이 오면 직접 아이들 상담도 실시하였다. 3년 동안 소소한 갈등은 있었지만 학폭사안으로 접수되는 사안 없이 평화롭게 보냈다.
생활지도에는 자신감을 가지고 옮겨간 학교의 첫해, 내가 교직을 계속 유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든 한 해를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학급을 안전하고 평화롭게 운영할 수 없었다. 또다시 깊은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맞이했다.
두 번째 질문 “어떤 문제상황에서도 학급을 안전하고 평화롭게 경영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만약 내가 이 어려움을 휴직으로 해결한다면 다시 학교로 돌아올 자신이 없을 것 같아 그 한 해를 그냥 버텼다. 당시 나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잘 먹지 못했다. 여기에서 포기한다면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처한 어려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예전에 들었던 회복적 생활교육을 떠올리고 그 단어가 들어 있는 연수란 연수는 모두 찾아 들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온 정성을 다 쏟은 위기학생 외에 내가 놓친 80퍼센트의 아이들을 보게 되었다. 그 아이들과 공동체를 다지는 여러 활동을 하면서 문제행동을 하는 아이들의 변화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점차 내가 찾아온 해답이 ‘회복적 생활교육’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2019년 다시 생활부장 업무를 맡게 되면서 내가 꿈꾸는 학교와 학급을 만들고 싶었다. 학생들에게 또래중재자교육과 학급별 서클 수업 4시간, 교사 연수 5회기, 학부모 연수 5회기를 실시하고 학교 전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즉시 개입해서 학폭사안으로 가기 전에 대화모임으로 조정하였다. 학급담임과 생활부장을 동시에 했지만 힘든 줄 모르고 한 해를 보냈다. 그 해 전근을 앞둔 나에게 교감선생님께서 “선생님같이 회복적 생활교육을 하는 분을 생활부장으로 초빙하고 싶은데 추천해 주실래요?”라는 말을 듣고 ‘학교 차원의 시스템 구축이나 관리자의 노력없이 한 사람이 하는 활동이 과연 지속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세 번째 질문 “학교 차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급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2020년 연구년 교사로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급과 학생에 대한 지원활동을 하면서 학급과 학교의 문제는 단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학교 안의 지원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2022년 학교에서 가장 힘든 아이들의 담임이 되었다. 담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있기에 학교 관리자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내가 감당하고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홀로 힘든 아이들을 감당하면서 80퍼센트의 아이들과 함께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어려움은 있었지만 보람도 있었던 한 해였다. 만약 내가 회복적 생활교육을 배우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과 어려움을 겪는 학급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학교 안에 구축되어 있었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학교를 떠나 교육청으로 파견을 가는 결정을 했다. 내가 늘 느꼈던 한계에 대한 해답을 찾아서 학교 안에서 할 수 없다면 학교 밖에서 지원하는 시스템을 좀 더 구축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공동체를 도와줄 길을 찾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회복적 생활교육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한계에 대한 도전이고 선배 교사로서 후배들을 위한 나의 소명이라고 믿었다.
네 번째 질문 “교육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공동체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2023년 교육청으로 파견을 오면서 관계회복지원단 학교지원프로그램의 형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왜냐하면 학교 관계자의 인식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의 프로그램이 단지 일회성의 학교 면피용으로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 관계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으면서 그들이 참석해야 되는 필요성을 설득시키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우리들은 학교 관계자가 문제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문제아로 보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아이로 보며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에 눈물 흘리는 순간을 같이 했다. 긴 시간 진행되는 대화모임에 참석한 교감 선생님이 대화모임이 끝나고 “다음번에 학교에 갈등이 있으면 연락할게요. 그때 와 주실 수 있죠?”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 진행자들의 노력으로 학교의 만족도도 높아지고 학교지원프로그램도 정착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 프로그램의 정착을 위해서 수많은 갈등에 직접 나가서 갈등도 조정하고 나머지 파견업무도 처리하면서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서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 같다. 진행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내년에도 이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염려가 있다.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관계회복지원단에 대한 홍보와 내년도에 연구년과 파견으로 오시는 선생님께 먼저 갈등조정역량강화를 위한 연습에 도움을 드리는 것이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후배님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갈 것이라는 믿음도 있다.
내가 지금까지 이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만큼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열정이 가득했던 시절에 실시한 대화모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화모임이 끝나고 석양이 비치는 어스름한 복도를 재잘재잘 이야기하면서 걸어가는 엄마와 아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은 그들의 삶에 기여했다는 나에 대한 감사와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던 그들에 대한 감사였다. 아직도 그 순간의 감동을 나는 기억한다.
만약 누군가 이 길을 걸어가라고 나에게 말했다면 나는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옳다고 믿었고 체험했기에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걸어왔던 것 같다. 회복적 정의는 내가 쉽고 편안하게 가고 싶을 때도 이 신념과 다른 길을 걸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다. 앞으로의 나의 삶도 이 철학과 함께 할 것이다. 이제 3개월 남은 파견업무를 잘마무리하고 학교로 돌아가서 아이들과 함께 소소한 즐거움을 나누면서 회복적 정의의 철학이 내 삶에 스며든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해 준 단짝인 너(회복적 정의 철학)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