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이야기]참호를 넘어서 <적> l 박성실 회복적정의연구소 연구원

2025-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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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를 넘어서 <적>

박성실 회복적정의연구소 연구원





“전쟁이다.”


  사막과도 같은 전선, 이곳에는 두 개의 참호가 있다. 하나는 나의 것, 다른 하나는 적의 것. 나는 아침이면 총을 한방 쏘고, 적이 머리 내밀기만을 종일 기다린다. 배고파도 먼저 불을 피울 수 없다. 그 틈에 다가와 나를 죽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너무 배고프면 먼저 불을 피우기도 한다. 그러면 적도 불을 피운다.


  우리는 둘 다 배고프지만, 나는 적과 다르다. 적은 여자와 어린이들을 죽인다. 아무 이유도 없이 말이다. 그래서 전쟁이 벌어졌다. 전투 지침서에 따르면 그는 야수다. 동정심이라고는 없는.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는 나의 가족을 절멸시킬 것이다. 나무를 불태우고, 마시는 물에 독을 탈 것이다. 적은 인간이 아니다.


  그림책, <적>(문학동네)은 매우 간결하고,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참호전’이라고 불렸던 세계 1차대전의 전선을 떠오르게 한다. 병사들은 전장의 일상에서 죽음의 공포와 혹독한 날씨, 배고픔과 더불어 ‘왜’라는 질문과 씨름해야 했다. 그들은 전쟁의 주체였지만, 싸움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 외에 상대를 제거해도 괜찮을 이유 말이다.


  그림책에서 전쟁 지침서를 언급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침서에 따르면 적은 무찌르지 않으면 안전을 침해할 탈인간화된 존재, ‘야수’였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 위험한 존재였으므로 싸움은 정당했으며, 전선에서의 일상은 가족과 동료, 무고한 이들을 지키는 정의로운 시간이었다.


  대한민국이 들썩이고 있다. 계엄선포와 해지, 탄핵 심판의 과정에서 분열된 대한민국은 전쟁과도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곳곳에서 탄핵 찬·반 시위가 날을 세우고, 청문회장에서는 날마다 고성이 오갔다. 어떤 이들은 서부지법을 점거해 기물을 파손하고, 법정에서는 의도적으로 증인을 자극하거나, 사법부 자체를 불신하는 언사가 등장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방송사의 편향된 보도와 여러 유튜브 채널이 두려움을 부추기는 방식이었다. 양측은 모두 ‘정의’라 말하고, ‘법’을 외쳤지만, 많은 이들이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무찔러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전투 지침서의 ‘야수’처럼 말이다.


  별이 쏟아지는 날 그림책의 화자, ‘나’는 마음먹었다. 달이 뜨지 않는 밤 적의 참호로 건너가 전쟁을 끝내겠다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생각했다. 적이 저 별들을 보고 있다면 무용한 전쟁을 어서 끝내야 한다는 걸 깨달을 거라고.


  그믐밤 ‘나’는 참호에서 기어 나와 적의 참호로 향했다. 적의 참호는 비어 있었다. 그날 밤 적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적은 ‘나’의 참호로 간 것이다. 마치 별의 메시지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적의 빈 참호에는 말린 고기 몇 점과 막대 비타민 몇 개 그리고 가족사진과 전투 지침서가 있었다. 적은 ‘나’처럼 누군가의 가족이었다. 적의 지침서에는 괴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인류는 늘 안전을 원해왔지만, 국가적으로는 전쟁을, 일상에서는 누군가와 무리 지어 갈등을 지속해 왔다. 모순되게도 그 이유는 인간이 안전을 원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위협이 커질수록 누군가와 유대감을 형성해 집단이 되고자 한다. 참호를 쌓고, 대열을 정비해 스스로 보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싸움을 먼저 끝내자고 제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안전을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상대의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소통의 가능성이 희박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상대가 괴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참호는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안전지대다. 동시에 자신을 숨기고, 상대를 보지 못하게 하는 공간이다. 그들은 참호 때문에 서로의 인간성을 보거나, 보여주기 어렵다. 그렇게 상대의 존재는 불확실성 속에 놓인다. 많은 경우 인간은 불확실성을 가능성보다 두려움으로 여긴다. 적의 참호에서 생명을 건 전투를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만큼 안전지대라고 여겼던 방어벽을 넘어서 갈등 중인 누군가에게 찾아가는 건 두렵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막상 참호에 도착해 보면, 사실 상대도 인간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상대에게 괴물로 여겨졌던 건 자신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때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다. 몇 가지 질문과 더불어 말이다.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가, 인간을 제거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누가 그들을 적으로 만들었는가, 악마화했는가, 누가 전쟁 지침서를 만들었는가?


  그림책의 표지를 보면 ‘적’이라는 제목 밑에 훈장을 잔뜩 단 어느 장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거수경례하고 있는 장군은 웃고 있지만, 양손에는 피가 뚝뚝 흐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장군이 그림책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 양차 대전을 반성하면서, 인류는 전쟁을 범죄로 규정했다. 동시에 존엄성에 근거해 ‘인권’이라는 개념을 구체화했고, 민주주의 사회의 법적 근거로 삼았다. 법적 근거라는 말은 그것이 ‘정의’의 근거로 표방된다는 것이다. 존엄한 인간을 괴물로 대상화하고, 적으로 간주하려는 시도는 정의롭지 못한 욕망을 숨기기 위한 것이다. 표지에 등장하는 장군과 그가 경례하고 있는 누군가의 욕망 말이다. 그림책은 ‘나’와 마주한 참호 속 적이 아니라 표지에서 웃고 있는 장군의 태도, 눈이 향하는 곳, 그들이 숨기고 있는 것을 ‘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인간성을 회복할 사회적 안전지대를 조성하기보다, 좌절된 정의 욕구로 복수심에 불타고 있다. 한국 사회가 마주한 진짜 위협은 무엇인가? 악마화된 상대인가, 인간의 존엄성 위에 서 있지 않은 ‘정의’ 개념인가? 두려움을 부추기는 시스템인가? 시스템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짜 ‘적’은 무엇인가?


  그림책 <적>은 병사들이 줄을 맞춰 서 있는 그림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단 한 병사가 네잎클로버를 물고 있다. 흐름을 보면 네잎클로버를 물고 있는 병사는 ‘나’이다. 네잎클로버를 행운이라고 볼 때 ‘나’는 적이 인간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적의 이야기를 마주한 나’는 상대로부터 전쟁을 끝내자는 메시지를 기다렸다. 적의 인간성에 기대어 전쟁을 끝내고자 한 것이다. 기다리다 지친 그는 손수건에 메시지를 써 병에 담았다. 그리고 적에게 힘껏 던졌다.


  이렇듯 그림책의 ‘나’는 정의 시스템의 부재 앞에 질문을 만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것이 별이든, 한 편의 시이든, 유머이든, 노래이든 우리는 인간성을 일깨울, 함께 바라볼 밤하늘을 모색할 수 있다. 싸움을 멈추고 서로의 인간성에 기대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진실을 향한 위험천만한 한 걸음의 용기를 내보는 것이다. 진정한 안전지대를 향해 참호를 넘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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