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글]한국사회 변화를 위한 구상 l 정주진 평화갈등연구소장

2025-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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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변화를 위한 구상


주제글2 회복적 정의, 새로운 사회를 꿈꾸다 - 사회

정주진 평화갈등연구소장, 평화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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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진: 평화연구를 통해 사회 변화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평화, 갈등해결과 관련된 강의, 책쓰기, 홈페이지 글쓰기 등을 하고 있다.


 2024년 12월 3일은 역사적인 날이다. 보통 역사적인 날은 국가 또는 공동체에 큰 의미가 있고 기념할 만한 일이 있는 날이다. 그러나 이 날은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절망스러운 날로 영원히 기억될 날이다. 군사독재 이후 45년 만에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군 헬기가 국회의사당에 착륙하고 군인들이 국회 본청에 진입해 국회의원들의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와 체포를 시도한 날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시민들의 저항과 국회의 신속한 표결로 다행히 비상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됐으나 이 일은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비상계엄이 해제된 뒤에도 우리는 역사적인 날들을 목격했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의 민주주의와 법치를 부인하는 언어와 행동, 윤석열을 옹호하고 보호하려는 극우 집단과 개인들의 극단적인 주장과 폭력 선동 등은 상상을 초월했다. 혐오의 언어가 난무했고 심지어 그들이 ‘적’으로 규정한 시민과 법원에 대한 물리적 폭력까지 있었다. 윤석열은 파면됐으나 4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전례 없는 정치적 사건에서 비롯된 사회갈등은 최악의 수준으로 악화했고 우리 사회 곳곳에 깊은 생채기를 냈다. 조기 대통령 선거가 결정되고 대선 운동이 시작된 뒤 탄핵 찬성과 반대 국민 사이의 대립 수위는 낮아졌다. 그러나 사회 갈등은 해결되지도 중단되지도 않았다. 이는 정치적, 사회적 상황 변화에 따라 비슷한 사회갈등이 재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회갈등 재발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우리 사회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것이고, 세계적으로 우파가 세를 키워가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는 이례적인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단절과 그로 인한 사회갈등이 다른 사회와는 다르게 심각하고 앞으로 더 우려되는 이유는 그것이 이념갈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사회의 정치갈등 및 사회갈등 또한 이념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은 보수 또는 극우 진영이 가진 북한이라는 오랜 적에 대한 증오, 무엇보다 한국전쟁이라는 구체적 사건과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무력 대결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회의 이념갈등과는 강도가 다르다. 이념갈등이 대략 8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강화되고 고착되었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최선의 선택은 이념갈등을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완화하는 것이다. 이념갈등은 세계관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사실상 해결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등 당사자 집단과 개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폭력적 대결을 선택하지 않는 수준으로 완화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념갈등 완화를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민주주의 규범의 회복이다. 이는 정치의 기능 정상화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 사회 이념갈등이 강화된 이유 중 하나는 정치권의 이념 악용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념은 정치인들의 지지확보 도구였고 그런 이유로 정치권은 이념갈등 완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보수 성향 정치권이 이념갈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면 진보 성향 정치권은 이념갈등을 방치 내지 관망하면서 선명성을 조장하고 반대 급부를 누렸다. 정치의 기능 정상화를 위해 우선적으로 이념과 이념갈등을 이용하지 않는 정치를 만들어야 한다. 민주주의 규범 회복을 위해서는 법치주의를 튼튼히 하는 한편 사법체계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정치 기능의 정상화 또한 필요하다. 민주주의 정치는 상호 인정과 정치 규범의 준수, 상호 견제와 절제, 그리고 도덕성 준수에 기반해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대통령 파면을 법적인 절차에 따라 해결한 건 다행이나 비상계엄 뒤 여당이 당연하게 대통령을 조치하고 사임하게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도 법원에서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정치 관련 사건들이 다뤄지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는 물론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말해준다.


 민주주의 규범 회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시민 역량의 향상이다. 가장 가치 있고 지켜져야 할 민주주의 규범은 시민의 감시와 비판이 작동하고, 시민의 의견이 적절하고 적극적인 방식을 통해 수렴되고 반영되는 것이다. 비상 계엄 뒤 탄핵 과정을 통해 우리가 확인한 건 우리의 민주주의가 생각만큼 기반이 튼튼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민주주의 규범조차 모호한 것으로 전락했다. 한편으로 시민 역량이 높음을 확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시민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 또한 확인했다. 결국 전체적으로 민주주의 규범을 지키고 정치를 감시하고 민주주의 사회를 무난하게 유지할 만큼의 시민 역량이 부족함을 확인한 셈이다. 그러므로 시민 역량 향상은 우리 사회의 시급한 문제 중 하나이며 이를 위해 민주시민교육, 시민 대화 등 시민 역량 향상을 위한 다양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사회 변화를 위한 노력으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건 바람직한 미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당연한 것 같지만 최근의 변화는 그것이 사회적 합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또한 사회 구성원 사이에 민주주의의 의미와 작동 방식에 대해 이견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어떤 민주주의에 기반한 어떤 미래를 원하는지, 그런 사회 실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논의하고 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논의와 합의 과정은 사회 구성원들이 점진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그에 따라 민주시민의 역량을 키울수 있게 한다.


 이런 사회 변화를 위해서는 전략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평화학자인 존 폴 레더락(John Paul Ledereach)이 제안한 시간의 틀을 참고할 수 있다. 그는 평화구축(peacebuilding)을 위한 4단계로 구성된 시간 틀(time frame)을 제안했는데 이는 모든 사회의 변화 전략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첫 번째 단계는 위기 개입 단계로 즉각적인 대응과 행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2-6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 두 번째 단계는 준비와 훈련에 맞춰지며 1-2년의 단기적 계획을 말한다. 비슷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전보다 잘,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 세 번째 단계는 사회 변화에 맞춰진 것으로 5-10년의 기간을 필요로 한다. 이는 장기적인 변화 구상이다. 네 번째 단계는 바람직한 미래에 맞춰지는데 20년 이상을 내다보는 구상을 말한다.1) 첫 번째 단계는 두 번째 단계 구상 안에서 이뤄져야 하고 나아가 세 번째, 네 번째 단계의 맥락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는 첫 번째는 물론 두 번째 단계가 세 번째, 네 번째 단계의 목표와 모순되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 곧 단기적 대응이라 할지라도 장기적인 사회적 목표를 위해 계획되고 실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지 않으면 단기적 대응은 최악의 경우 오히려 장기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또한 사회 변화와 바람직한 미래는 계속 청사진 또는 선전 문구 속에만 존재하게 된다. 네 개의 단계는 순차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큰 틀 안에서 조율되고 함께 진행될 때 변화가 이뤄질 수 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 첫 번째 단계의 대응은 무사히 이뤄내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두 번째 단계부터사회차원의 구상이 여전히 없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시민 교육과 준비가 이뤄져야 하지만 그런 사회적 준비와실행이 아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세 번째 및 네 번째 단계와 관련해서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안갯속이다. 특히 이념갈등에서 비롯된 정치갈등과 사회갈등이 전혀 완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장기적 구상을 위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이에 대한 논의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가 직면한과제는 너무 많다. 소득 불평등, 노동, 성평등과 젠더갈등, 이념갈등, 남북관계, 기후위기 등의 문제는 우리 사회가 반드시 다루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야 하는 현안들이다. 이를 다루지 않으면서 사회 변화를 이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요구할지도 고민해야 한다. 동시에 각자 민주시민으로 사회 변화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지도 고민해야 한다.



1) John Paul Lederach (1997) Building Peace: Sustainable Reconciliation in Divided Societies.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Press,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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