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을 위한 싸움
주제글4 회복적 정의, 새로운 사회를 꿈꾸다 - 정치
박제민 녹색정치연구소

박제민: 공존을 위해 ‘녹색정치’를 화두로 연구하고 활동하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주권자로 사는 세상을 위해 정치개혁과 선거제도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 녹색정치연구소 연구원과 공동대표, 선거제도개혁연대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최근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회에서 이준석 후보의 문제적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사전에 준비한 전략이라고 한다. 이게 대체 무슨 전략인가. 딴에는 ‘일타삼피’의세 가지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첫째, 이재명 후보의 도덕성을 공격하여 지지자들을 열광시키는 것. 둘째, 권영국 후보와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을 난처하게 만들어 지지자들을 열광시키는 것. 셋째, 결국 이재명의 상대는 김문수 후보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선전하여 지지자를 더 끌어모으는 것. 너무 잘하고 싶다가 일을 망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이번 이준석의 발언이 딱 그렇다.
이준석은 상대 후보자의 도덕성을 검증하기 위해 불가피했기 때문에 그 표현을 엄청나게 순화해서 인용했을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편함을 느꼈을 사람들을 향해서는 사과한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런 사과는 진짜 사과가 아니라는 것을.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하면 되는데, ‘같잖은 사과’를 하는 것을 보니 많이 당황해서 비겁하게 변명하는 것 같다. 자기들끼리 야심 차게 준비한 전략이 통하지 않고 오히려 역풍이 부니 그럴 만도 하다.
대통령이든 대통령의 아들이든 아버지든 사돈의 팔촌이든 간에, 누구라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면 그것 자체가 심각한 언어 성폭력이다. 그런데 또 다른 누군가가 방송에서 그런 발언을 다시 언급하는 것, 더욱이 그 의도가 가해자를 꾸짖고 피해자에게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타삼피’를 노리는 전략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언어 성폭력이자 매우 악질적인 협잡이다. 심지어 그 말을 내뱉은 사람이 대통령후보자이고, 그 말을 내뱉은 시공간이 대선 토론회였다면, 정치인 이전에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공감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무명에 가까운 게 아니라 무명 그 자체였던 이준석이 이른바 ‘박근혜 비대위’의 비대위원으로 깜짝 발탁되어 정치에 등장한 게 벌써 십수 년 전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혁신위원, 최고위원, 당대표, 국회의원까지 하면서 유명인사는 되었는데, 정작 그가 정치인으로서 우리 공동체를 위해 이뤄낸 성과가 있는지 희미하다. “이준석” 하면 여성 혐오, 세대 갈등, 장애인 차별 등을 부추기며 갈라치기를 해서 자기편을 모으는 데 열중한다는 이미지가 또렷하다.
그런 이준석에게 한편에서는 말 잘한다고 마이크를 쥐여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말을 섞는 것 자체가 ‘극우의 씨앗’을 키우는 것이라면서 언급 자체를 꺼렸다. 그런 과분한 관심과 과도한 무시 속에서 이준석은 컸고, 마침내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 많은 국민이 보는 앞에서 버젓이 언어 성폭력을 저질렀다. 많은 시민이 이준석의 발언을 두고 분기탱천하고 있는데, 한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침묵하지 말고, 주변에 있는 이준석 지지자와 적극적으로 싸워달라는 주문이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말이 있다. 실은 똥을 치울 때 고약한 냄새를 맡거나 손에 묻을지 무서운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 무서운 마음을 극복하고 똥을 치워야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폭력을 목격하면, 피해자와 연대하는 것과 동시에 가해자에게 가해 사실을 인지시켜서 책임을 지게하고 반복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시작은 “야, 너, 그거 가해야.”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의 일천한 경험에 의하면 십중팔구는 안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싸울 각오도 해야 한다. 무서워도 싸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래된 침묵을 깨고 이준석을 지지한다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
‘녹색정치’를 화두로 연구하고 활동하고 있지만 녹색정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가 늘 어렵다. 다만 작은 결론은, 녹색정치란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여러 생명이 지구 안에서 서로 돕고 함께 사는 삶, 즉 ‘공존’을 추구하는 정치적인 행동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난개발, 환경오염, 자연 파괴, 기후 위기, 빈부격차와 불평등의 심화, 계급·지역·젠더 갈등, 자국 우선주의, 보호무역주의, 미·중 패권 경쟁, AI 위기, 포퓰리즘의 발호, 극우 정당의 부상, 테러, 전쟁, 쿠데타 등이다. 개별적인 사건인 것 같아도 모두 공존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녹색정치와는 ‘상극’이다. 저런 것들이 기승을 부리는 지금 바로 녹색정치가 절실히 필요하다.
계엄과 내란, 탄핵과 파면 과정에서 우리의 민주주의와 정의가 파괴 직전까지 내몰릴 만큼 허약하다는 것을 몸소 겪었다. 천신만고 끝에 열린 조기 대선은 우리 공동체의 신뢰가 철저히 파괴되어 있으며 이른바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의 수준이 밑바닥이라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이준석의 매우 전략적인 언어 성폭력을 보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가해자에게 가해 사실을 알려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싸움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싸움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공존을 위한 싸움이 회복의 시작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사랑의 화신인 예수도 어떤 싸움은 부추겼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하면서.
주제글4 회복적 정의, 새로운 사회를 꿈꾸다 - 정치
박제민 녹색정치연구소
박제민: 공존을 위해 ‘녹색정치’를 화두로 연구하고 활동하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주권자로 사는 세상을 위해 정치개혁과 선거제도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 녹색정치연구소 연구원과 공동대표, 선거제도개혁연대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최근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회에서 이준석 후보의 문제적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사전에 준비한 전략이라고 한다. 이게 대체 무슨 전략인가. 딴에는 ‘일타삼피’의세 가지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첫째, 이재명 후보의 도덕성을 공격하여 지지자들을 열광시키는 것. 둘째, 권영국 후보와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을 난처하게 만들어 지지자들을 열광시키는 것. 셋째, 결국 이재명의 상대는 김문수 후보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선전하여 지지자를 더 끌어모으는 것. 너무 잘하고 싶다가 일을 망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이번 이준석의 발언이 딱 그렇다.
이준석은 상대 후보자의 도덕성을 검증하기 위해 불가피했기 때문에 그 표현을 엄청나게 순화해서 인용했을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편함을 느꼈을 사람들을 향해서는 사과한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런 사과는 진짜 사과가 아니라는 것을.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하면 되는데, ‘같잖은 사과’를 하는 것을 보니 많이 당황해서 비겁하게 변명하는 것 같다. 자기들끼리 야심 차게 준비한 전략이 통하지 않고 오히려 역풍이 부니 그럴 만도 하다.
대통령이든 대통령의 아들이든 아버지든 사돈의 팔촌이든 간에, 누구라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면 그것 자체가 심각한 언어 성폭력이다. 그런데 또 다른 누군가가 방송에서 그런 발언을 다시 언급하는 것, 더욱이 그 의도가 가해자를 꾸짖고 피해자에게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타삼피’를 노리는 전략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언어 성폭력이자 매우 악질적인 협잡이다. 심지어 그 말을 내뱉은 사람이 대통령후보자이고, 그 말을 내뱉은 시공간이 대선 토론회였다면, 정치인 이전에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공감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무명에 가까운 게 아니라 무명 그 자체였던 이준석이 이른바 ‘박근혜 비대위’의 비대위원으로 깜짝 발탁되어 정치에 등장한 게 벌써 십수 년 전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혁신위원, 최고위원, 당대표, 국회의원까지 하면서 유명인사는 되었는데, 정작 그가 정치인으로서 우리 공동체를 위해 이뤄낸 성과가 있는지 희미하다. “이준석” 하면 여성 혐오, 세대 갈등, 장애인 차별 등을 부추기며 갈라치기를 해서 자기편을 모으는 데 열중한다는 이미지가 또렷하다.
그런 이준석에게 한편에서는 말 잘한다고 마이크를 쥐여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말을 섞는 것 자체가 ‘극우의 씨앗’을 키우는 것이라면서 언급 자체를 꺼렸다. 그런 과분한 관심과 과도한 무시 속에서 이준석은 컸고, 마침내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 많은 국민이 보는 앞에서 버젓이 언어 성폭력을 저질렀다. 많은 시민이 이준석의 발언을 두고 분기탱천하고 있는데, 한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침묵하지 말고, 주변에 있는 이준석 지지자와 적극적으로 싸워달라는 주문이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말이 있다. 실은 똥을 치울 때 고약한 냄새를 맡거나 손에 묻을지 무서운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 무서운 마음을 극복하고 똥을 치워야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폭력을 목격하면, 피해자와 연대하는 것과 동시에 가해자에게 가해 사실을 인지시켜서 책임을 지게하고 반복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시작은 “야, 너, 그거 가해야.”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의 일천한 경험에 의하면 십중팔구는 안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싸울 각오도 해야 한다. 무서워도 싸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래된 침묵을 깨고 이준석을 지지한다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
‘녹색정치’를 화두로 연구하고 활동하고 있지만 녹색정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가 늘 어렵다. 다만 작은 결론은, 녹색정치란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여러 생명이 지구 안에서 서로 돕고 함께 사는 삶, 즉 ‘공존’을 추구하는 정치적인 행동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난개발, 환경오염, 자연 파괴, 기후 위기, 빈부격차와 불평등의 심화, 계급·지역·젠더 갈등, 자국 우선주의, 보호무역주의, 미·중 패권 경쟁, AI 위기, 포퓰리즘의 발호, 극우 정당의 부상, 테러, 전쟁, 쿠데타 등이다. 개별적인 사건인 것 같아도 모두 공존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녹색정치와는 ‘상극’이다. 저런 것들이 기승을 부리는 지금 바로 녹색정치가 절실히 필요하다.
계엄과 내란, 탄핵과 파면 과정에서 우리의 민주주의와 정의가 파괴 직전까지 내몰릴 만큼 허약하다는 것을 몸소 겪었다. 천신만고 끝에 열린 조기 대선은 우리 공동체의 신뢰가 철저히 파괴되어 있으며 이른바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의 수준이 밑바닥이라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이준석의 매우 전략적인 언어 성폭력을 보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가해자에게 가해 사실을 알려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싸움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싸움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공존을 위한 싸움이 회복의 시작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사랑의 화신인 예수도 어떤 싸움은 부추겼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