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의 이름으로 던져진 돌과 침묵하는 공동체
: 영화 <더 스토닝(The Stoning of Soraya M.)>이 남긴 질문들
주제글4 회복적 정의와 여성 l 김성례 배재대학교 기초교육부 조교수
김성례: 배재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중동 지역 여성 인권과 난민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며 ‘명예’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가족의 명예, 공동체의 체면, 사회적 평판. 그것들은 우리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중요한 가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 명예가 한 사람의 생명보다 우선하는 가치로 작동할 때,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잃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국제 인권단체들의 보고에 따르면, 중동·북아프리카·남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오늘날에도 이른바 ‘명예살인(honor killing)’이라 불리는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가족이나 공동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여성을 살해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가족이 정한 배우자를 거부하거나 종교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여성은 ‘부정한 존재’로 낙인찍히며, 성폭력의 피해를 입었거나 근거 없는 소문에 휘말린 경우조차 처벌의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건은 일부 지역에서 연간 수백 건에 이를 수 있다는 추정이 존재하지만, 명예살인이보고되지 않거나 다른 유형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아 실제 발생 수준은 정확히 파악되기 어렵다.
명예살인은 종종 이슬람의 교리에서 비롯된 문제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슬람 율법과 코란 어디에도 가족의 명예를 이유로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이슬람 학자와 종교 지도자들 역시 명예살인을 종교적 가르침과 무관한 폭력적 관습으로 비판해 왔다. 이러한 폭력은 종교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오랜 사회 구조와 문화적 관습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가부장적 질서와 부족 중심의 연대 체계, 가족의 명예를 집단적 자산으로 여기는 관습, 그리고 여성의 성적 순결을 공동체 질서와 연결시키는 문화적 규범이 결합되면서 여성의 삶이 공동체의 체면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여겨지는 현실이 지속되어 온 것이다.
전통적 공동체 사회에서 명예는 개인의 체면을 넘어 집단의 신뢰와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하는 핵심 자산으로 작동해 왔다. 혼인 관계와 경제적 교류, 사회적 협력은 공동체 평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여성의 행동은 가족 전체의 명예를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쉬웠다. 특히 여성의 정조와 성적 순결은 가문의 명예를 상징하는 기준으로 여겨졌고, 그 책임은 여성 개인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여성의 정조와 몸, 그리고 행동이 가족의 평판과 사회적 신뢰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면서, 여성은 자신의 삶을 넘어 공동체의 체면을 지켜야 하는 존재로 자리매김되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여성의 삶과 권리가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상징적 장치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명예가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는 규범으로 작동할 때, 여성의 삶은 집단의 명예를 지키는 수단으로 도구화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여성의 의견과 경험이 쉽게 소외될 수 있다.
한 여인의 죽음은 영화 속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돌아보게 한다. 이러한 현실을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작품이 영화 〈더 스토닝〉이다. 이 작품은 1980년대 이란의 한 시골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프랑스-이란 출신 언론인 프레이둔 사헤브잠(Freidoune Sahebjam)의 기록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이후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야기 속에서 소라야는 네 아이의 어머니로 살아가고 있다. 남편은 더 어린 여성과 재혼을 원한다. 하지만 이혼을 하면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따른다. 그는 그 부담을 피하기 위해 소라야에게 간통 혐의를 씌운다. 마을에는 공식적인 재판 절차나 충분한 사실 확인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남편의 주장은 곧바로 의혹이 아니라 ‘사실’처럼 다뤄지고, 소라야에게는 자신을 변호할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종교 지도자와 촌장은 남편의 권위를 우선하며, 여성의 정조를 공동체의 명예와 연결 짓는 관습을 따르는 판단을 내린다. 소라야는 끝까지 결백을 호소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사실상 그녀의 유죄를 인정한다. 누구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누구도 진실을 묻지 않는다. 그들의 침묵은 판단이 되고, 그 판단은 곧 처벌로 이어진다.
이 영화는 한 여성의 비극적 죽음을 넘어, 여성의 삶과 권리가 공동체 질서 속에서 어떻게 희생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동시에 피해자의 고통이 외면되는 구조와 공동체의 침묵을 돌아보게 하며, 여성 인권과 정의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어떤 책임을 나누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만든다.
영화 속 처형 장면은 단순한 폭력의 재현을 넘어 공동체가 어떻게 폭력에 참여하도록 조직되는지를 보여 준다. 여성은 허리까지 땅에 묻히고, 돌은 남편과 가족, 마을 남성들에 의해 차례로 던져진다. 이 행위는 개인적 분노의 표출이라기보다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의례처럼 수행된다. 폭력은 집단적 참여 속에서 정당화되고, 침묵은 그 폭력을 완성하는 마지막 요소로 기능한다.
그러나 이 폭력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돌을 던진 사람들만이 아니다. 무고함을 짐작하고도 침묵한 이웃들, 부당함을 알면서도 공동체의 분위기에 따르기로 한 사람들, 갈등을 피하기 위해 외면한 사람들 또한 이 폭력에 가담한셈이다. 공동체의 침묵은 비극을 완성할 뿐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마을 사람들은 폭력을 불가피한 선택으로 정당화했다.
여성의 시선에서 이 이야기가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소라야의 삶이 완전히 낯선 이야기로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여성이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감정을 누르는 법을 배워 왔다. 이는 개인의 성향이라기보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사회문화적 질서 속에서 형성된 태도였다.
회복적 정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누가 상처 입었는가? 우리는 무엇을 외면해 왔는가? 그리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회복적 정의는 처벌 중심의 정의관을 넘어, 상처 입은 사람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공동체가 책임을 함께 나누며 관계의 회복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중시한다. 침묵 대신 경청을, 배제 대신 참여를, 비난 대신 책임 있는 응답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제도적 대안이라기보다 공동체가 스스로의 관계를 회복해 가는 윤리적 태도에 가깝다.
명예살인과 같은 극단적인 폭력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목소리보다 공동체의 체면을 앞세우고 갈등을 덮어 두려 할 때, 우리는 침묵이라는 방식으로 정당하지 않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침묵은 평화를 지키는 태도로 보이지만, 진실을 외면한 평화는 결국 또 다른 상처를 남긴다.
회복은 거창한 제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는 일, 침묵 대신 질문을 건네는 용기, 상처 앞에 함께 서 있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외면되어 온 고통을 드러내고 침묵을 깨며 책임을 함께 나눌 때, 공동체는 비로소 회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더 스토닝〉의 이야기는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이지만, 그 이야기가 전해지는 순간 침묵의 질서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정의는 처벌의 완성에 있지 않다. 침묵 속에 묻힌 진실을 드러내고 공동체가 책임을 함께 마주할 때, 회복은 비로소 시작된다. 이제 우리는 침묵이 아닌 책임의 언어로 서로를 마주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 영화 <더 스토닝(The Stoning of Soraya M.)>이 남긴 질문들
주제글4 회복적 정의와 여성 l 김성례 배재대학교 기초교육부 조교수
김성례: 배재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중동 지역 여성 인권과 난민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며 ‘명예’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가족의 명예, 공동체의 체면, 사회적 평판. 그것들은 우리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중요한 가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 명예가 한 사람의 생명보다 우선하는 가치로 작동할 때,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잃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국제 인권단체들의 보고에 따르면, 중동·북아프리카·남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오늘날에도 이른바 ‘명예살인(honor killing)’이라 불리는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가족이나 공동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여성을 살해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가족이 정한 배우자를 거부하거나 종교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여성은 ‘부정한 존재’로 낙인찍히며, 성폭력의 피해를 입었거나 근거 없는 소문에 휘말린 경우조차 처벌의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건은 일부 지역에서 연간 수백 건에 이를 수 있다는 추정이 존재하지만, 명예살인이보고되지 않거나 다른 유형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아 실제 발생 수준은 정확히 파악되기 어렵다.
명예살인은 종종 이슬람의 교리에서 비롯된 문제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슬람 율법과 코란 어디에도 가족의 명예를 이유로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이슬람 학자와 종교 지도자들 역시 명예살인을 종교적 가르침과 무관한 폭력적 관습으로 비판해 왔다. 이러한 폭력은 종교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오랜 사회 구조와 문화적 관습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가부장적 질서와 부족 중심의 연대 체계, 가족의 명예를 집단적 자산으로 여기는 관습, 그리고 여성의 성적 순결을 공동체 질서와 연결시키는 문화적 규범이 결합되면서 여성의 삶이 공동체의 체면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여겨지는 현실이 지속되어 온 것이다.
전통적 공동체 사회에서 명예는 개인의 체면을 넘어 집단의 신뢰와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하는 핵심 자산으로 작동해 왔다. 혼인 관계와 경제적 교류, 사회적 협력은 공동체 평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여성의 행동은 가족 전체의 명예를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쉬웠다. 특히 여성의 정조와 성적 순결은 가문의 명예를 상징하는 기준으로 여겨졌고, 그 책임은 여성 개인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여성의 정조와 몸, 그리고 행동이 가족의 평판과 사회적 신뢰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면서, 여성은 자신의 삶을 넘어 공동체의 체면을 지켜야 하는 존재로 자리매김되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여성의 삶과 권리가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상징적 장치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명예가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는 규범으로 작동할 때, 여성의 삶은 집단의 명예를 지키는 수단으로 도구화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여성의 의견과 경험이 쉽게 소외될 수 있다.
한 여인의 죽음은 영화 속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돌아보게 한다. 이러한 현실을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작품이 영화 〈더 스토닝〉이다. 이 작품은 1980년대 이란의 한 시골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프랑스-이란 출신 언론인 프레이둔 사헤브잠(Freidoune Sahebjam)의 기록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이후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야기 속에서 소라야는 네 아이의 어머니로 살아가고 있다. 남편은 더 어린 여성과 재혼을 원한다. 하지만 이혼을 하면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따른다. 그는 그 부담을 피하기 위해 소라야에게 간통 혐의를 씌운다. 마을에는 공식적인 재판 절차나 충분한 사실 확인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남편의 주장은 곧바로 의혹이 아니라 ‘사실’처럼 다뤄지고, 소라야에게는 자신을 변호할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종교 지도자와 촌장은 남편의 권위를 우선하며, 여성의 정조를 공동체의 명예와 연결 짓는 관습을 따르는 판단을 내린다. 소라야는 끝까지 결백을 호소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사실상 그녀의 유죄를 인정한다. 누구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누구도 진실을 묻지 않는다. 그들의 침묵은 판단이 되고, 그 판단은 곧 처벌로 이어진다.
이 영화는 한 여성의 비극적 죽음을 넘어, 여성의 삶과 권리가 공동체 질서 속에서 어떻게 희생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동시에 피해자의 고통이 외면되는 구조와 공동체의 침묵을 돌아보게 하며, 여성 인권과 정의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어떤 책임을 나누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만든다.
영화 속 처형 장면은 단순한 폭력의 재현을 넘어 공동체가 어떻게 폭력에 참여하도록 조직되는지를 보여 준다. 여성은 허리까지 땅에 묻히고, 돌은 남편과 가족, 마을 남성들에 의해 차례로 던져진다. 이 행위는 개인적 분노의 표출이라기보다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의례처럼 수행된다. 폭력은 집단적 참여 속에서 정당화되고, 침묵은 그 폭력을 완성하는 마지막 요소로 기능한다.
그러나 이 폭력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돌을 던진 사람들만이 아니다. 무고함을 짐작하고도 침묵한 이웃들, 부당함을 알면서도 공동체의 분위기에 따르기로 한 사람들, 갈등을 피하기 위해 외면한 사람들 또한 이 폭력에 가담한셈이다. 공동체의 침묵은 비극을 완성할 뿐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마을 사람들은 폭력을 불가피한 선택으로 정당화했다.
여성의 시선에서 이 이야기가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소라야의 삶이 완전히 낯선 이야기로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여성이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감정을 누르는 법을 배워 왔다. 이는 개인의 성향이라기보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사회문화적 질서 속에서 형성된 태도였다.
회복적 정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누가 상처 입었는가? 우리는 무엇을 외면해 왔는가? 그리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회복적 정의는 처벌 중심의 정의관을 넘어, 상처 입은 사람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공동체가 책임을 함께 나누며 관계의 회복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중시한다. 침묵 대신 경청을, 배제 대신 참여를, 비난 대신 책임 있는 응답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제도적 대안이라기보다 공동체가 스스로의 관계를 회복해 가는 윤리적 태도에 가깝다.
명예살인과 같은 극단적인 폭력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목소리보다 공동체의 체면을 앞세우고 갈등을 덮어 두려 할 때, 우리는 침묵이라는 방식으로 정당하지 않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침묵은 평화를 지키는 태도로 보이지만, 진실을 외면한 평화는 결국 또 다른 상처를 남긴다.
회복은 거창한 제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는 일, 침묵 대신 질문을 건네는 용기, 상처 앞에 함께 서 있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외면되어 온 고통을 드러내고 침묵을 깨며 책임을 함께 나눌 때, 공동체는 비로소 회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더 스토닝〉의 이야기는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이지만, 그 이야기가 전해지는 순간 침묵의 질서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정의는 처벌의 완성에 있지 않다. 침묵 속에 묻힌 진실을 드러내고 공동체가 책임을 함께 마주할 때, 회복은 비로소 시작된다. 이제 우리는 침묵이 아닌 책임의 언어로 서로를 마주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