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J 연구자료]로저스가 조정자에게 묻다 l 이재복 전북지부 지부장

202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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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스가 조정자에게 묻다 : 갈등의 최전선,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서 있습니까?


(인간중심 상담 철학과 조정자의 역할)

이재복 국회복적정의협회 전북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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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복: 회복적 정의의 가치를 삶으로 실천하며, 매일 더 나은 조정을 고민하는 ‘조정남’을 꿈꾸고 있다. 대학원에서 교육상담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조정위원에 대한 심층 연구를 진행하면서 관련 주제를 바탕으로 학위 논문을 집필하며, 현장과 학문을 잇는 실천적 지식을 축적하고 있다.


 칼 로저스는 1940년대 초에 비지시적, 혹은 '인간중심 상담(Person-Centered Therapy)'이라고 불리는 심리 치료를 개척했습니다. 이 심리 치료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아실현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긍정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둡니다. 내담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로 여겨지며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로 간주됩니다. 로저스의 접근 방식의 핵심은, 치료사가 내담자를 판단없이 수용하고 깊이 공감하며 진실된 태도로 다가갈 때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학적 원리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대화모임의 중심에 있는 '조정자(Mediator)'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팽팽한 적대감과 방어기제가 날것으로 부딪히는 공간에서, 조정자는 과연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람들을 대해야 할까요?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칼 로저스의 철학은 이 무거운 질문에 대해 매우 따뜻하고도 날카로운 해답을 제시합니다.



  1.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 : '실현 경향성'


 로저스의 이론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로저스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는 스스로를 치유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하려는 긍정적인 본성, 즉 '실현 경향성(Actualizing Tendency)'이 숨 쉬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회복적 정의가 추구하는 바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회복적 정의에서 조정자는 가해자나 피해자를 '우리가 고쳐주거나 훈계해야 할 부족한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대신,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인간성을 재발견하고 스스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2. 전환점을 만드는 조정자의 세 가지 마음가짐

 

 로저스는 닫힌 마음을 열고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세 가지 핵심적인 태도를 제시했습니다. 


 첫째,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Unconditional Positive Regard)입니다.

 이는 대상의 특정한 행동이나 생각에 대한 판단, 평가, 비판을 보류하고 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깊은 환대의 태도입니다. 조정자는 당사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탐색할 수 있도록 비지시적이고 따뜻한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해자의 나쁜 행동을 옹호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폭력적인 행동(Deed)과 그 사람(Doer)을 철저히 분리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행동 뒤에 웅크리고 있는 한 인간의 상처와 두려움을 비판 없이 가치 있게 여겨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진실성 혹은 일치성(Congruence)입니다.

 관계 안에서 거짓이나 겉치레 없이 진실하고 개방적으로 존재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조정자가 '나는 완벽한 전문가야'라는 딱딱한 가면(Facade)을 벗어던지고, 솔직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대화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만 조정자의 경우,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통제 불능 상태로 드러내기보다는 당사자들에게 부드러운 호기심으로 질문을 던지고 투명하게 소통함으로써 서로가 진정으로 연결되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셋째, 공감적 이해(Empathic Understanding)입니다.

 섣부른 판단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주관적인 경험과 감정의 세계에 마치 자신의 것인 양 깊이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피해자의 끔찍한 고통은 물론, 가해자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복잡한 핑계와 감정의 맥락까지도 판단 없이 들어 주는 깊은 경청을 의미합니다.



3. 학교폭력 현장에서 만난 '무장 해제'의 순간


 이론이 아닌 실제 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학교폭력 대화모임에 나온 한 학생이 "저 애가 먼저 맞을 짓을 했어요"라며 다리를 꼬고 불량하게 앉아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럴 때 조정자의 마음속에서는 '당장 저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아야겠다'는 분노와 훈계의 충동이 거세게 일어납니다. 하지만 조정자는 이내 숨을 고르고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을 선택합니다. 거친 욕설을 훈계하는 대신, 묵묵히 학생의 날 선 에너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그렇게까지 분노했던 데에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진짜 힘든 이유가 있었을것 같아. 나는 너를 평가하러 온 게 아니란다." 세상의 모든 어른에게 비난만 받으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공격적인 가시를 세웠던 학생은, 자신을 온전한 인격체로 존중해 주는 모습에 달라진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누군가 자신을 온전히 수용해 줄 때, 가해자는 비로소 방어기제 없이 자신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는지 직면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를 얻게 됩니다.



4. 결론: 기술을 넘어선 '존재(Being)'의 힘


 결국, 차갑게 얼어붙은 갈등의 땅에서 변화의 새싹을 틔우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화려한 대화의 기술이나 잘 짜인 매뉴얼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대화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조정자의 '존재 양식(Being)' 그 자체입니다. 어떤 한계의 순간에도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는 '알지 못함의 자세(Not-Knowing Stance)'가 우리의 오만한 머리를 겸손하게 만든다면, 로저스의 '무조건적 존중과 진정성'은 우리의 식어가는 가슴을 다시 뜨겁게 데워 줍니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상처 입은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마음으로 존재해야 할까요? 로저스가 묻는 이 묵직하고도 따뜻한 질문이 여러분의 가슴 속에도 작은 울림을 만들어 내길 바랍니다.



 참고문헌

Greene, R. R. (2017). Carl Rogers and the person-centered approach. In Human Behavior Theory and Social Work Practice (pp. 145–165).Routledge.


Moon, K. A. (2006). La congruence du thérapeute non directif : Un paradoxe éthique, pasun conflit théorique. Approche Centrée sur la Personne. Pratique et recherche, (3), 28-44.


Woodward, L. (2020). Carl Rogers. In The Wiley Encyclopedia of Personality and Individual 

Differences. John Wiley & Sons.


Yao, L., & Kabir, R. (2023). Person-centered therapy (Rogerian therapy). In StatPearls. StatPearls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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