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한 기후재난 앞에서 경계를 넘어 공존하기 l 이예본 작가

20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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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한 기후재난 앞에서 경계를 넘어 공존하기

'907 기후정의행진' 참여 일기

이예본 작가



이예본: 극을 씁니다. 주거, 환경, 여성, 노동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 젊은 친구 지구에 온 것을 환영하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곳이라네 둥글고 축축하고 북적대는 곳이라네 자네 이곳에서 고작해야 백 년이나 살까 ♬ <이랑 - 좋은 소식, 나쁜 소식>


 ‘기후위기’라는 단어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 무력해진다. 단순히 내가 빨대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텀블러를 가지고 다닌다고 해서, 분리배출을 잘했다고 해서, 페트병의 라벨을 벗겨냈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은 나의 선택들이 큰 변화를 일으키길 기대하지만, 대개는 나 하나 달라진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는 우울감을 동반한다. 비율로 따지면 후자가 압도적이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이 공동체로서의 감각일 것이다. 거기엔 나 혼자 이 변화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포함된다. 나 혼자만의 발버둥이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걸음을 인지하기, 특정한 경계 안에서의 만남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종(種)의 경계를 넘어 공존하기. 


 2024년 9월 7일 토요일, 강남역 일대에서 ‘907 기후정의 행진’이 있었다. 올해의 슬로건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를 외치며 신논현역에서 선릉역을 지나 삼성역까지 행진했다. 자칫 동어 반복으로도 느껴질수 있는 이 슬로건은 내가 느끼기에 굉장히 영리하게 지어진 문장이다. 이 세상에서 ‘기후’만을 떼어내어 바꿀 수는 없다.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으므로 무언가 바꾸기 위해선 전 지구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기후정의 행진에서 요구하는 메시지들은 ‘차별 철폐, 돌봄과 공공 의료 및 교통 확충’, ‘에너지 정의’, ‘탈석탄/탈화석 연료 계획 마련’, ‘공공 재생에너지 전환’, ‘노동자-시민 주도의 정의로운 전환 실현’, ‘4대강 보 사업 철회’, ‘생태농업 전환 계획 수립과 동물 착취 시스템 철폐’ 등이다. 그리고 이 모든 요구는 ‘불평등이 기후재난’이라는 기본권 문제를 바탕으로 한다.  


 기후위기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 산업혁명을 이루기 위한 선진국들의 선택이 개발도상국으로 흘러왔다. 이 오랜 역사는 나비효과처럼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으며, 국가나 지역, 소득에 따라 체감하는 기후가 달라진다. 단순히 말하자면 누군가는 항상 미리 에어컨을 틀어주는 집에 살았을 테고 다른 누군가는 이제야 집에 에어컨을 달 수 있게 되었을지 모른다. 또 다른 누군가는 선풍기와 부채로 열대야를 나야 했을 것이고누군가는 침수로 집을 잃어 어느 때보다 모진 장마를 견뎌야 했을 것이다. 불평등이 곧 기후재난이고,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는 건 그런 의미이다. 


 행진에는 춤과 노래, 목소리들이 함께했다. 서두에 인용한 노래의 가수 ‘이랑’의 공연도 인상적이었고 여러모로 다채로운 행렬 역시 의미 있었다. 여성과 남성이, 청년과 노인이 같이 걸었고 휠체어 탄 사람과 킥보드를 타는 어린아이가 어우러졌다. 대학교 로고가 박힌 깃발과 농업인 조합, 노조의 깃발이 펄럭이는 중에 길을 걷다 합류하여 잠시 같이 걷는 행인들도 있었다. 무엇으로도 획일화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인파를 이루었다. 그리고 서울의 가장 번화한 중심지 강남역 일대를 가로질렀다. 우리는 커다란 빌딩 사이를 통과하며 구글과 쿠팡과 포스코 사거리라는 기점을 통과했다. 매 기점에서 기업이 행하는 반-생태적인 선택뿐만 아니라 노동과 공생에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서도 목소리 내 외쳤다. (물론 더운 여름연휴를 앞둔 주말,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사람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남아 있다) 그리고 다이인(die-in) 퍼포먼스1)를 하기도 했다. 예상해 보건대 3만 여명의 참가자들은 아마 당장 내년 여름 더위의 문제 이상으로 ‘궁극적인 세상’의 변화를 꿈꿀 것이다. ‘녹아내리는 북극곰의 빙하’ 등으로 타자화된 이미지가 아니라 당장 우리가 경험하는 기후 불평등이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는 앞서 말했던 공동체로서의 감각이 확장되는 일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덕담을 나누기에는 추석까지도 더위의 기세가 만만찮았던 올해, ‘907 기후 정의행진’ 역시 덥고 뜨거웠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방향으로 걸어 나간다는 점에서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행진의 목적과 바람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던 발언의 일부를 옮겨 적으며 글을 마무리해 보려고 한다. 2019년 축사에서 도살 예정이었던 생후 2주차의 돼지 새벽이를 구조하여 돌보고 있는 ‘새벽이 생추어리’의 운영 활동가 발언의 일부이다.  


 오늘 우리는 여기 사회적 지위, 재산, 성별, 직업, 장애, 나이, 거주지, 국적과 같은 것에 의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고, 현재의 차별적인 체제를 전환하자고 모였습니다. 정의가 누구도 배제하지 않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모인 우리의 외침이 배제 없는 체제 전환을 향하는 것이기를. 착취의 고리를 끊어내는 투쟁이기를 바랍니다. 이 현장에 올 수 없는 이들에게 종을 넘어 연대하는 투쟁이기를 바랍니다. 




1) 사이렌 소리를 시작으로 참가자들이 일정 시간 동안 아스팔트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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