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동그라미 l 고상훈 제주시교육청 회복적생활교육지원단

20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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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동그라미

회복적 실천 : 나의 교실, 나의 실천

고상훈 제주시교육청 회복적생활교육지원단




고상훈 : 제주에서 어린이를 가르칩니다. 회복적 정의를 어린이와 함께 실천하고 있습니다. 에세이 『신규교사 생존기』, 동화 『졌잘싸』와 『버스가 좌회전했어요』를 썼습니다. 


 벌써 동그라미 교실을 만들고자 노력한 지도 5년이 되었다. 교실의 처방전처럼 받아들였던 회복적 생활교육은 약처럼 교실의 하루를 고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실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앎의 영역이었던 회복적 생활교육은 회복적 정의가 되어 내 삶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아직은 앎과 삶이 분리되어 여전히 삐거덕거리고 있지만, 내가 만난 동그라미는 내게 수많은 의미로 자리 잡았다. 오늘의 이야기는 나의 생각에 대한 이야기이며, 어쩌면 우리의 철학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일 수도 있다. 또한, 누군가의 생각과도다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우리가 만든 동그라미에서는 평가의 영역이 아니라, 이해의 영역일 것이라 믿는다. 



1. 진실


 이제껏 내가 겪었던 학교는 사실 확인이 중요했다. 얼마나 빈틈없고 빠르게 할 수 있는지가 선생의 실력을대변해왔다. 나는 그걸 잘했고 무려 잘한다는 칭찬을 듣곤 했다. 18년도 우리 반엔 왕따가 있었다. 나는 왕따를 만들어 낸 어린이들을 그야말로 일망타진했다. 분리와 진술, 정해진 형태의 서면 사과가 따랐고 남은학년의 시간은 조용히 흘렀다. 그러나 2년 후, 교실 밖에서 만난 아이는 여전히, 그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했던 일이 일망타진이 아니라 그냥, 조각난 교실을 얼기설기 붙여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사실만 확인한 채, 진실을 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회복적 생활교육은 어린이들에게 사실 대신 진실을 듣고자 한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하나의 사실을 두고서 여럿의 진실이 달라붙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전에서는 사실을 ‘실제 있었던 일’, 진실을 ‘거짓이 없는 사실’이라고 간단하게 말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사실과 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사실’이 객관적 영역이라면, ‘진실’은 주관적 영역이다. 사실에 각자의 사연이 붙었을때, 그것은 비로소 진실이 된다. 회복적 생활교육은 ‘사실’ 대신, ‘진실’을 요구한다. 진실을 요구함으로써 우리는 단순 사실 확인을 통해 듣지 못했던, 사실을 둘러싼 숱한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어쩌면, 사실보다 더 가혹할 진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2. 듣기


 회복적 생활교육은 말하는 시간보다 듣는 시간이 훨씬 길다. 간혹 몇몇 서클을 보고 말하는 것, 혹은 달변이 중요한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지만, 오히려 잘 듣는 것이 더 중요한 시간이다. 나도 그랬다. 세번째 회복적 생활 교육 집합 연수를 들을때, 내가 강사를 찾아가 물은 것은 말하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어린이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 때, 정용진 선생님께서는 내게 ‘서클에 참여는 하나요?’라는 취지로 되물으셨다. 동문서답과도 같았던 질문에 내 질문도 흐지부지되어버렸지만, 몇십 번의 서클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 동문서답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말하기를 부담스러워 패스를 일삼는(?) 어린이도 서클에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어린이는 서클을 떠나지 않고 듣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서클을 여는 이유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듣기’ 위함이었다. 말하는 것은 다음의 문제였다. 들어야만, 말할 수 있었다. 어린이가 말하기를 진정으로 기다린다면, 듣기만 하는 어린이를 기다려야 했다. 그 어린이는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은날, 입을 열었다. 1년 서클에 대한 소감으로 ‘재밌었어’라고 짧게 말했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이 말은, 나이가 들수록 ‘들을 수 있는’ 공간을 찾으라는 말과 같다(지갑을 열어야 그들을 한 공간으로 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린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그 어린이가 어른이가 되어, 어디서나 열심히 입은 닫고 지갑을 열 것이다(?). 


3. 균형


 교실에서는 힘의 균형이 자주 무너진다. 누군가에게 힘이 기울어 있는 경우도 있고, 대세를 따라 휩쓸려 추가 쉽게 기울어 버리는 경우도 더러 있다. 교실 내 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다수결 원칙의 투표를 많이 하는교실로서는, 이러한 불안정한 힘의 균형이 참 불편하다. 힘 있는 누군가의 의견에 저도 모르게 동조하거나,다수가 되고 싶은 마음에 제 의견 없이 손을 들어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교실 공동체를 위한 결정이아니라, 일종의 밴드왜건 현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불균형에서 회복적 생활교육의 동그라미는 균형의 ‘사발통문’이다. 모두가 균일한 발언권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발언 중에도생각은 대세에 흔들리기 마련이겠지만. 


 올해 5월은 그 기분 좋은 균형감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다. 스포츠데이를 앞두고 우리 반 티셔츠 색상을 고르는 때, 다수결 투표로 색을 정하는 대신, 서클을 열었다. 우리 반을 상징할 수 있는 색을 골라나름의 이유를 붙여 설명해 달라는 부탁에 어린이들은 시답잖은 이유를 붙여가며 검은색과 흰색을 추천했다. 그러던 중, 한 명이 노란색을 추천했는데, 그 이유가 나름대로 그럴 듯 했다. 우리 반은 신호등 색깔 중에서 노란색을 닮았다는 이유를 붙였다. 늘 싸우는 빨간색도 아니고 늘 좋기만한 초록색도 아니고, 노란색이라고. 적당히 놀고 다퉈서 좋다고.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서, 친구들이 추천한 색 중에 하나를 골라 말해달라는 질문으로 다시 토킹스틱을 돌렸을 때,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색이 노란색이었다. 소수의 의견도힘을 가질 수 있다는 기분 좋은 균형감을 모두가 느낀 순간이었다. 


4. 피스(piece)


 처음 회복적 생활교육을 접했을 때는 반감이 상당했다. 당시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개중에서도 토킹피스 (스틱), 센터피스가 반감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뭐랄까, 피스(piece)들은 살아있는 교육이 아니라,회복적 생활교육을 마치 ‘짜인 연극’같이 느껴지게 했다. 그래서 회복적 정의 철학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교실을 꾸려갈 때에도 토킹피스와 센터피스에 대해서 만큼은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나름대론 모범생이기에,토킹피스와 센터피스 없이 서클을 운영한 적은 없었지만, 토킹피스는 단순한 발언권으로 이해했고, 센터피스는 둘 곳 없는 시선이 머무는 곳쯤으로 이해했다. 


 그런 내가 피스들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된 것은 어린이들의 역동성 덕분이었다. 어린이들이 피스의 진짜의미를 내게 확인시켜주었다. 여느 서클의 어느날, 어린이는 발언을 하려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토킹피스를 우스꽝스럽게 내밀어 보였다. 이제, 내가 말할 차례이니 존중해달라는 시위였다. 교실은 한바탕 웃음이 터졌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작고 하찮은 토킹피스가 가지고 있는 대단한 힘을 느꼈다. 토킹피스가 단순한 발언권을 넘어 존중의 상징물, 혹은 존중의 약속이라는 것. 


 또 다른 어느 날, 센터에 깔아둔 센터피스에 이미지 카드를 흩뿌려놓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어린이가 마지막 소감을 나누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이었다. “사진 고르려고 친구들이 센터피스를 밟고 다녀서불편했다”는 말이었다.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상황을 곰곰이 지켜보던 그 어린이는 속상했던 마음을 말했다. 언젠가, 선생인 내가 센터피스는 곧, 우리 반을 상징하는 거라고 말했던 걸 기억했던 어린이가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게 밟고 있는 센터피스를 보며, 마음을 졸였던 것이다. 선생이라는 자가 센터피스에 대해배운 걸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말해놓고선, 그때야 비로소 내가 한 말을 돌이켜 생각했다. 


 센터피스는 공동체를 의미했다. 조금씩 채워져가는 유의미의 공간을 말하고 있었다. 피스의 의미를 어린이들로부터 깨달은 뒤로, 나는 피스들을 꽤 아낀다. 토킹피스는 꼭 서클 시간이 아니더라도, 항상 목에 걸고다니며 존중을 새기고자 노력하고 있다. 아무렇게나 구한 러그를 깔아놓고 서클 규칙만 덩그러니 놓여 있던 센터피스에는 우주를 상징하는 러그를 깔고, 서클을 마칠 때마다 찍은 사진을 인쇄해서 매 서클마다 하나씩 채워나가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과 우리 반이 함께 걸어온 시간을 보여주고자 한다. 


5. 안전


 그동안 안전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교육과정을 만들며 시달렸던, 7대 안전 교육이었다. 그래서 ‘안전’한 공간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떤 안전을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게 다가왔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어색한 공간에서 둥그렇게 모여 앉으라고 시켜놓고선, 내게 ‘안전함을 느꼈으면 한다’는말이 상당히 낯설었다. 그러니, 그 ‘안전’이라는 말이 오히려 편안한 말이 아니라, ‘불편안’한 말로 다가왔다.그도 그럴 것이 안전은 그동안, 내게는 1차원의 개인 영역이었다. 각종 영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내가’ 수많은 대처방안을 알고 있는 것이 내게는 ‘안전’이었다. 그래서 안전한 마음을 느꼈으면 한다는 말이 불편하게 다가온 것이다. 내가 아는 안전은 내가 만드는 것이지, 누군가 그걸 바란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시간이 지나서야, 회복적 생활교육에서 말하고자 하는 안전이 이제껏 내가 겪었던 안전과는, 7대 안전과는다른 무언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회복적 생활교육에서 말하는 안전은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아끼는 3차원의 안전을 의미했다. 그러니 회복적 생활교육에서의 안전은 어떤 개인의 책임이강조되는 대처 방법이나, 예방법 따위가 아니라 상대를 확인하고 의식하고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편안한 곳이 되어주는 함께의 책임이었다. ‘안전함을 느꼈으면한다’는 말이 통하는 3차원의 안전이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난 뒤부터 ‘생존 수영’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사회가 해석하는 안전의 개념은 1차원이다. 상상하기 싫지만, 비슷한 참사가 일어난다면 어린이들은 개인의 책임으로 스스로를 살려야 한다. 어쩌면, 세월호 참사에 대한 것들이 여전히 가라앉아 있는 것이 이전의 나처럼 ‘함께의 책임’으로서의 ‘안전’을 겪지 못한 탓은 아닐까. 


6. 연결


 회복적 생활교육을 배우고 실천하며, 가장 강력하게 느끼는 것이 ‘연결’이다. 어린이들은 교실에서 연결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몇몇 관계가 굵직한 연결선으로 연결될 뿐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쉽지 않다. 학교는 공동체를 늘 강조하지만, 공동의 몸(體)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 회복적 생활교육은 그것을 지긋지긋하게 확인시켜준다. 교실에서 벌어진 일이 아무 관련 없는 내게 주는 영향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서로 다른 것 같았는 데도 신기하게도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을, 단짝인 줄 알았던 친구가 의외로 다른점이 있다는 것을, 나도 이 공동체에서 소속되어 있는 중요한 누군가라는 것을, 지겹도록 알려준다. 


 서클을 꾸준히 열고, 말하고 듣도록 하는 것 또한, 연결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나도 소속된 공동체가 많지만, 유독 회복적 생활교육 지원단이라는 공동체에 대해서만큼은 믿음이 강하다. 내가공동체에서 한낱 먼지가 아니라, 한 부분을 차지하고 연결되어 있음을 지속적으로 구성원들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연결된 만큼 눈치도 많이 보이는데, 유독, 회복적 생활교육 지원단 모임에 결석하는 것만큼은 대범하지 못하다. 우리반 어린이들도 서클이 있는 날, 한 명이라도 빠지면 참, 많이 아쉬워한다. “오늘 서클은 24명이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OO이가 조퇴해서 아쉬웠어요.” 그만큼, 연결된 공동체는 한 명이라도 티가 많이 난다. 


 이렇게 여섯 꼭지로 나누어 서툴게 말했지만, 그보다 내 삶의 더 많은 부분이 회복적 생활교육의 동그라미를 만나 변했고, 또 변하고 있다.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여전히 앎과 삶 사이에서 비틀거리고 있지만 그 또한, 적당하면서도 꽤 자랑스러운 성장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난 어린이들도 이것을 겪었으면 한다. 이러한 내 변화의 유산을 어린이들에게 조금 더 빨리 전하고, 더 그럴듯한 어른이 되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크다. 그리고 생각에 희망을 더해, 언젠가는 학교가 『회복적 학교』에서 읽었던 것처럼 어느 교실을아예 ‘서클 교실’로 꾸밀 수 있으면 좋겠다. 서이초 사건 이후로 갑자기 생긴 (어린이에게 성찰을 외롭게 강요하는) ‘성찰실’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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