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J 저널 22년 3월호] 코로나19와 폭력 _ 김영식 목사(낮은예수마을교회)

2022-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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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폭력1)


김영식 목사(낮은예수마을교회)



1. 서론 

 

인수공통감염병 코로나19의 전 지구적 확산과 유행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문명이 초래한 인류의 대재앙이다. 장기간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동안 우리가 만들었던 사회적 시스템과 그 속에서 맺어왔던 우리의 사회적 시스템과 그 속에서 맺어왔던 우리의 사회적 관계성들이 약한 대상을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종속시키려는 폭력적 질서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것을 총체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2. 자연과 폭력

 

개발과 발전이라는 인간의 무한한 이기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은 자연에 대한 일방적이고도 무분별한 파괴를 일삼아 왔다. 거대한 숲을 파괴하고 동물들을 집단 가축화시켜 도살, 유통시켰다. 머물 숲을 빼앗겨버린 야생동물들은 자연스럽게 인간과 접촉하며 인수공통바이러스를 인간에게 감염시킨 것이다.


경마 산업을 위해 산림을 개발함으로 갈 곳을 잃은 과일박쥐가 말을 통해 인간에게 전염시킨 헨드라 바이러스(1994, 호주 브리즈번)를 비롯해 과일박쥐, 돼지를 통해 전염된 니파 바이러스(1998, 말레이시아), 가금류를 통한 조류독감(AI) 바이러스(2014, 중국), 낙타를 통한 메르스 코로나바이러스(2012, 요르단), 그리고 박쥐와 천산갑을 통해 전염된 것으로 알려진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바이러스적 재앙들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자연을 일방적으로 지배, 종속시키려는 인간의 폭력성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적 관계성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며 문명사적 전환을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는 재앙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후 변화로 인한 식량 위기는 국가간 갈등과 전쟁의 위협을 증가시킨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와 자가격리는 이동을 제한시킴으로 일손의 부족과 농작물 감소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식량 가격 상승을 불러와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며 국가간 식량 민족주의를 유발시키게 될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불균형한 폭력 관계가 결국 인류 공동체의 위기와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은 재난의 불평등으로 되돌아온다. 

 

 

3. 인간과 폭력

 

코로나19 감염 사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성 또한 지배와 종속의 폭력성에 기반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 및 유엔여성기구와 같은 국제 사회는 일찍이 코로나19 감염 사태 상황이 가정 폭력을 더 심화시킬 수 있음을 경고하며 피해자 구조와 지원을 위한 대책 마련을 표명한 바 있다(2020). 감염병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 외출 제한 등으로 사적 공간인 가정에서의 생활시간이 증가함에 따라, 가정 내에서 폭력이 발생하고 학대와 통제가 더욱 심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다. 생후 8개월 된 딸을 입양한 부모가 지속적인 학대와 폭력으로 8개월 만에 16개월 딸을 사망에 이르게 한 정인이 사건이 2020년 코로나 정국 속에서 일어났다. 췌장이 절단될 정도의 심한 폭력의 흔적들이 정인이 몸에 남아 있었다. 정인이 양부모가 개신교 가문 출신이라는 것에 온 사회는 더욱 경악했다. 20대 친부모가 생 후 2주된 아들을 폭행해 숨지게 하기도 했다(2021.2). 남편은 아내를 상습적으로 폭행했고, 가정폭력 신고까지 있었다. 생후 2주 된 아들의 오줌 싸는 것을 훈육 대상으로 삼았다는 부모의 말 속에는 사망 당시 아들 의 두개골이 함몰될 정도의 끔찍한 폭력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물론, 코로나19 이전에도 인간에 대한 지배와 종속을 위한 폭력 관계는 존재해 왔다. 다만, 코로나19로 공적 활동이 제한받는 장기간의 조건은 사적 공간인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을 지속적으로 강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코로나19는 인간의 폭력적인 (지배)관계성을 성찰하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제도와 폭력

 

인간의 물리적인 폭력성은 제도와 구조 속에 숨겨진 폭력성을 전제로 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주관적 폭력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폭력은 객관적 폭력이라고 불렀다(『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옮김, 서울: 난장이, 2011). 


개인에 의해 물리적으로 자행되는 주관적 폭력과는 달리 객관적 폭력은 한 사회의 의식과 무의식에 작동하는 구조적 폭력이다. 폭력이 존재하는 이유는 기존 질서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권력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에 의하면, 지배체제란 동일화 기제의 폭력으로 상대방을 나와 동일한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존재의 차이를 무시하고 정체성을 강요함으로 배제를 양산하게 된다. 


따라서 개인의 물리적 폭력은 기존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작동되고 있는 구조적 폭력을 감추기 위해 자행된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학교폭력이다. 1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만들어내는 학교 제도와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은폐하기 위해 개인의 일상적인 물리적 폭력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엘리트 체육을 표방하는 학교 스포츠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감독과 코치, 선배와 뛰어난 엘리트 선수의 물리적 폭력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것이다. 폭력에 무뎌져 맞고도 시합에서 이기면 모두가 웃는다고 한다. 심지어 폭력을 당한 이후에 많은 초등학교 선수들은 더 열심히 운동을 해야겠다고 응답한 설문 조사 통계도 있다(국가인권위원회 인권실태 전수조사 2019). 제도와 구조 속에 내재된 폭력이 일상의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폭력의 가해자를 한  인의 인성이나 일탈의 문제로 치부해 버리고 제도 속에 내재 된 구조적인 폭력을 함께 살펴보지 못한다면 학교폭력의 근본적인 해결은 어렵다고 봐야 한다. 폭력을 향한 개인의 경계만큼 사회 구조적인 시스템과 문화적 관습 가운데 숨겨져 있는 폭력을 분별해내는 노력과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한 개인의 반성과 처벌만으로는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5. 교회와 폭력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인 권능과 권력으로 상대방을 제압, 지배하거나 종속시키는 폭력을 통해 구원을 이루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신에게 있는 신적인 파워를 끝까지 포기하는 십자가를 선택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십자가는 불법적인 폭력 앞에 자신을 희생양의 포로로 기꺼이 내어줌이다. 하나님은 왜 십자가의 폭력성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실 생각을 하신 것인가? 우리가 폭력 앞에 전율하며 실망하는 지점이다. 


십자가는 이 세상 폭력이 가지고 있는 최대치의 힘과 능력을 발산하도록 요청한 것이고,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폭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죽음의 폭력성은 진리를 위협하며 침묵시킨다. 십자가 죽음은 그런 폭력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의 폭력으로 죽은 예수를 부활시키셨다. 십자가 죽음을 일으킨 폭력의 결정을 무효 화시키신 것이다. 따라서 부활은 이 폭력의 잠재성이 결코 승리할 수 없고, 인류의 최종적인 대안도 되지 못 한다는 것을 이 세상 만천하에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교회는 폭력을 통해 자신의 기득권과 지배 질서를 유지하려는 세상 질서에 거룩한 균열을 일으키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부활 모형이다. 교회는 우리를 임의로 주관하기 위해 권세를 부리는 이방인의 폭력적인 집권자의 길을 따르지 않고(막 10:42), 자기를 비워 종이 되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막10:45)


따라서 교회가 구현해 내는 하나님 나라는 일방적 지배와 종속이라는 폭력적 질서에 기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기다림과 겸손, 오래 참음의 설득으로 이루어지는 사랑과 자유, 평등과 정의라는 인격적 가치 질서에 기반한다. 


따라서 교회는 이 세상의 폭력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성찰과 해결책을 고민해야 한다. 상대방을 내 뜻과 생각과 정체성으로 동일화시키려는 지배와 종속의 욕망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타인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함으로 배제와 폭력을 포기하는 화해와 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6. 결론

 

한국의 포크 가수 조동진이 만들고 부른 노래 중에 제비꽃이라는 노래가 있다. 한 사람의 지난한 성숙 과정을 조용히 관조하며 음미하는 노래이다. 상대방을 자신의 뜻에 맞춰 임의로 주조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며 담백하게, 하지만 따뜻하게 바라보며 존중할 뿐이다. 이 세계와 씨름하며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지 못해 답답해진 마음을 새처럼 날고 싶다고 표현하는 말에 귀 기울여 준다. 여전히 세계와 씨름하느라 야위어진 모습에 땀방울 흘리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 힘듦 속 에서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고 있다고 애써 웃으며 말하고 있는 이의 눈길을 주목해준다. 


계속되는 세계와의 씨름 속에서 이제는 어엿한 평화를 누리게 되었지만 한밤중에도 깨어 있는 열정을 갖고 있다고 웃으며 말하는 이의 소망을 격려해준다. 총 3절에 불과한 짧은 노랫말 속에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화해의 인격적 관계가 숨어있다.



1.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음 음 음 음 음 음 음 

2. 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 때 너는 많이 야위었고 

이마엔 땀방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음 음 음 음 음 음 음 

3. 내가 마지막 너를 보았을 때 

너는 아주 평화롭고 창 너머 먼 눈길 넌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 있고 싶어 

음 음 음 음 음 음 음 






1) 2021년 3월 16일 화해와 평화위원회(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사회봉사부) 세미나 

'코로나19와 폭력' 대발제로 발표되었던  글입니다. 




위의 글은 [RJ 저널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독자 투고는 누구나에게 열려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research@karj.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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