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소년법 개정에 대한 입장
“포기할 수 없는 정의”
인천 초등생 살인사건과 부산, 강릉, 아산, 서울 여학생들의 끔찍한 폭력사건이 연이어 폭로되고 있다. 너무나도 엽기적이고 잔인하고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하고 있다. 요사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이 엄청난 청소년 사건들을 접하면서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끼는 동시에 몇 년 전 우리 사회와 많이 닮아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2011년 말 학교폭력 문제가 몇 달씩 계속해서 신문지면을 덮은 적이 있다. 그 결과로 학교폭력을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조치를 골자로 하는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이 2012년 초에 발표되었다. 그 후로 교육계는 학교폭력 근절의 뿌리가 되는 관계성과 공동체성의 증대 그리고 학교 내 갈등의 평화적 전환을 위한 노력과 같은 교육적 기능을 강화하기보다는 개별사건에 대한 엄벌주의를 높이는 방향으로 대책을 세웠다. 그 결과 교사와 학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행정소송은 증가하였다. 또한, 교사의 생활지도 어려움은 점점 커지고 학교 공동체성이 약화되는 부작용으로 학교 현장은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와중에 교사는 학생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학부모의 민원 때문에 점점 지치게 되었다. 한 마디로 들끓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졸속으로 이뤄진 개정이 가져온 참사였다. 그런데 불과 두 달 전 교육부는 전국 400만 명 이상의 학생이 참여한 2017년도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학교폭력 피해 응답률이 1% 미만(0.9%)으로 나타났다며, 이제는 학교폭력이 하향 안정화 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밝혔다. 심지어 교육부는 이런 긍정적 결과가 우리 사회 전반에 학교폭력에 대한 경각심과 인식 수준이 높아진 것으로, 이는 학교폭력 근절을 위해 그동안 관계부처 합동으로 종합적인 대책을 지속 추진해 온 결과로 분석하며 성과를 자랑하기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2달 전 교육부의 자화자찬과 지금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극악무도한 청소년 사건 ―그것도 여학생 사건들―과의 관계는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와서 솔직하게 실태조사에 응하지 않은 피해 학생들을 탓할 것인가?
학폭법 개정 이후 실효성 없이 5년이 지난 지금 언론은 또다시 분노한 국민의 감정을 한곳으로 향하게 마치 경쟁하듯 이야깃거리를 찾고 있다. 이번에는 그 종착점이 소년법 개정이 될 것이다. 이미 정치권은 발 빠르게 소년법의 보호처분을 강화하는 쪽으로 손보려 하고 있다. 정치인은 마치 소년법을 개정하여 미성년 범죄자의 형량을 높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웃지 못할 코미디는 평소 선거권이 없어 관심에도 없던 청소년 문제를 분노한 여론에 편승해 부각하려 하니, 정당들은 청소년을 유해환경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든 <청소년 보호법>을 개정해야 하는지 <소년법>을 개정해야 하는지조차 헷갈리면서 즉흥적 해법을 내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여론이 고조됐고 분노한 국민을 안심시켜야 할 몫이 책임자에게 남는다. 따라서 이번에 우리 사회는 소년법을 반드시 개정할 것이다. 그것도 피해자를 위하여, 피해자의 이름으로 개정을 이뤄낼 것이다. 그래야 끝이 나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이 아프고 비참한 사건들은 우리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히기 시작할 것이다. 피해 학생과 가족의 요구, 다시는 이런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게 해달라던 외침은 먼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내용도 잘 모르는 강력한 조치들이 있으니 그 조치들이 우리의 자녀를 안전하게 구원해 줄 것이라고 우리는 굳건히 믿고 살게 될 것이다. 결국 비참한 피투성이 피해자는 우리 관심에서 소외되고, 온갖 비난과 처벌의 과정에서 가해자는 거꾸로 저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는 왜곡 현상이 이어질 것이다. 그 사이에 우리의 청소년은 또다시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이 과정에 방관자로 남게 될 것이다.
2012년처럼 이렇게 또 우리 사회는 즉흥적으로 청소년 폭력의 문제를 엄벌주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쉽게 마무리하려고 한다. 과연 엄벌이, 무관용주의가 괴물로 변해가고 있는 이 학생들에게 공감 능력을 다시 불어넣을 수 있을까? 자발적 책임감을 키워줄 수 있을까? 그것이 확실하다면 나는 엄벌주의를 지지한다. 하지만 법 개정이 우리가 던지는 심각한 물음들. ‘왜 이 시대의 학생들은 남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가?’ ‘왜 우리 학생들은 극단적으로 폭력적인가?’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근본적 해답을 주지 못한다면 나는 지금의 법 개정을 반대한다. 잘못된 청소년을 향해 돌을 던지고 손을 터는 어른보다, 차라리 그들(피해자와 가해자)과 함께 울어줄 어른이 필요하다. 또한 교육의 주체인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입장이 수렴되는 공론화 과정이 빠진 채로 시간에 쫓기듯 정치인과 법조인의 논의로 진행되는 개정 과정에 심각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폭력이 일상화되고 남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학생, 피범벅이 된 비참한 피해자를 보면서 우리는 이제 분노하기보다 진심으로 슬퍼하고 안타까워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왜 학생들이 이런 괴물이 되었는지, 무엇이 이들을 극단의 폭력에 익숙하게 만들었는지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때이다.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책임을 함께 찾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혼돈에 빠진 시대에 집단적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키우지만, 집단적 애도는 자성과 성찰을 불러올 수 있다. 어느 시대에도 다음 세대에게 ‘바름’과 ‘정의’를 가르치는 교육을 포기해선 안 된다. 우리는 다음 세대가 사법적 책임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만나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의 성찰만이 다음 세대에 치유라는 고귀한 선물을 전해줄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응징과 분노로 점철된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회복적 정의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다.
2017년 9월 1일
이재영 한국평화교육훈련원 원장
최근 소년법 개정에 대한 입장
“포기할 수 없는 정의”
인천 초등생 살인사건과 부산, 강릉, 아산, 서울 여학생들의 끔찍한 폭력사건이 연이어 폭로되고 있다. 너무나도 엽기적이고 잔인하고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하고 있다. 요사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이 엄청난 청소년 사건들을 접하면서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끼는 동시에 몇 년 전 우리 사회와 많이 닮아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2011년 말 학교폭력 문제가 몇 달씩 계속해서 신문지면을 덮은 적이 있다. 그 결과로 학교폭력을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조치를 골자로 하는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이 2012년 초에 발표되었다. 그 후로 교육계는 학교폭력 근절의 뿌리가 되는 관계성과 공동체성의 증대 그리고 학교 내 갈등의 평화적 전환을 위한 노력과 같은 교육적 기능을 강화하기보다는 개별사건에 대한 엄벌주의를 높이는 방향으로 대책을 세웠다. 그 결과 교사와 학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행정소송은 증가하였다. 또한, 교사의 생활지도 어려움은 점점 커지고 학교 공동체성이 약화되는 부작용으로 학교 현장은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와중에 교사는 학생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학부모의 민원 때문에 점점 지치게 되었다. 한 마디로 들끓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졸속으로 이뤄진 개정이 가져온 참사였다. 그런데 불과 두 달 전 교육부는 전국 400만 명 이상의 학생이 참여한 2017년도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학교폭력 피해 응답률이 1% 미만(0.9%)으로 나타났다며, 이제는 학교폭력이 하향 안정화 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밝혔다. 심지어 교육부는 이런 긍정적 결과가 우리 사회 전반에 학교폭력에 대한 경각심과 인식 수준이 높아진 것으로, 이는 학교폭력 근절을 위해 그동안 관계부처 합동으로 종합적인 대책을 지속 추진해 온 결과로 분석하며 성과를 자랑하기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2달 전 교육부의 자화자찬과 지금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극악무도한 청소년 사건 ―그것도 여학생 사건들―과의 관계는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와서 솔직하게 실태조사에 응하지 않은 피해 학생들을 탓할 것인가?
학폭법 개정 이후 실효성 없이 5년이 지난 지금 언론은 또다시 분노한 국민의 감정을 한곳으로 향하게 마치 경쟁하듯 이야깃거리를 찾고 있다. 이번에는 그 종착점이 소년법 개정이 될 것이다. 이미 정치권은 발 빠르게 소년법의 보호처분을 강화하는 쪽으로 손보려 하고 있다. 정치인은 마치 소년법을 개정하여 미성년 범죄자의 형량을 높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웃지 못할 코미디는 평소 선거권이 없어 관심에도 없던 청소년 문제를 분노한 여론에 편승해 부각하려 하니, 정당들은 청소년을 유해환경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든 <청소년 보호법>을 개정해야 하는지 <소년법>을 개정해야 하는지조차 헷갈리면서 즉흥적 해법을 내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여론이 고조됐고 분노한 국민을 안심시켜야 할 몫이 책임자에게 남는다. 따라서 이번에 우리 사회는 소년법을 반드시 개정할 것이다. 그것도 피해자를 위하여, 피해자의 이름으로 개정을 이뤄낼 것이다. 그래야 끝이 나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이 아프고 비참한 사건들은 우리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히기 시작할 것이다. 피해 학생과 가족의 요구, 다시는 이런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게 해달라던 외침은 먼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내용도 잘 모르는 강력한 조치들이 있으니 그 조치들이 우리의 자녀를 안전하게 구원해 줄 것이라고 우리는 굳건히 믿고 살게 될 것이다. 결국 비참한 피투성이 피해자는 우리 관심에서 소외되고, 온갖 비난과 처벌의 과정에서 가해자는 거꾸로 저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는 왜곡 현상이 이어질 것이다. 그 사이에 우리의 청소년은 또다시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이 과정에 방관자로 남게 될 것이다.
2012년처럼 이렇게 또 우리 사회는 즉흥적으로 청소년 폭력의 문제를 엄벌주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쉽게 마무리하려고 한다. 과연 엄벌이, 무관용주의가 괴물로 변해가고 있는 이 학생들에게 공감 능력을 다시 불어넣을 수 있을까? 자발적 책임감을 키워줄 수 있을까? 그것이 확실하다면 나는 엄벌주의를 지지한다. 하지만 법 개정이 우리가 던지는 심각한 물음들. ‘왜 이 시대의 학생들은 남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가?’ ‘왜 우리 학생들은 극단적으로 폭력적인가?’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근본적 해답을 주지 못한다면 나는 지금의 법 개정을 반대한다. 잘못된 청소년을 향해 돌을 던지고 손을 터는 어른보다, 차라리 그들(피해자와 가해자)과 함께 울어줄 어른이 필요하다. 또한 교육의 주체인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입장이 수렴되는 공론화 과정이 빠진 채로 시간에 쫓기듯 정치인과 법조인의 논의로 진행되는 개정 과정에 심각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폭력이 일상화되고 남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학생, 피범벅이 된 비참한 피해자를 보면서 우리는 이제 분노하기보다 진심으로 슬퍼하고 안타까워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왜 학생들이 이런 괴물이 되었는지, 무엇이 이들을 극단의 폭력에 익숙하게 만들었는지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때이다.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책임을 함께 찾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혼돈에 빠진 시대에 집단적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키우지만, 집단적 애도는 자성과 성찰을 불러올 수 있다. 어느 시대에도 다음 세대에게 ‘바름’과 ‘정의’를 가르치는 교육을 포기해선 안 된다. 우리는 다음 세대가 사법적 책임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만나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의 성찰만이 다음 세대에 치유라는 고귀한 선물을 전해줄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응징과 분노로 점철된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회복적 정의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다.
2017년 9월 1일
이재영 한국평화교육훈련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