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J 저널 12월호] 차라리 느슨한 공동체_한정훈 (회복적정의 교육센터)

202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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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느슨한 공동체

 

한정훈 (회복적정의 교육센터)

 


 “학교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평화교육훈련원(KOPI)에서 강사로 활동하면서 회복적 생활교육의 가장 주된 솔루션 중 하나로 제안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이다. 회복적 정의가 그런 것처럼 공동체 역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스터키는 아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부재가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꼭 학교가 아니더라도 공동체성을 높이려는 모든 시도가 의미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질문도 많다. “정말 학교가 공동체가 되면 좋은가?” 또는 “공동체가 될 수 있나?” 등 주장이 더 정교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질문부터, “공동체를 원하는 사람이 많을까, 공동체에 실망한 사람이 많을까?”, “우리가 말하는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가?”, “도대체 공동체란 무엇인가?” 등 근본적인 질문까지.

 

3년 전 피스빌딩과 충북 회복적생활교육연구회에서 공동체를 주제로 강의한 적이 있다. 이 강의를 통해서 앞에 언급한 질문을 다루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고, 올해 내용을 보태서 부산과 전남 알다(교사대학)에 참여해 다시 한번 같은 주제로 강의를 했다. 그러면서 이 주제를 더 고민하고,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답을 찾아가야 할지 어느 정도 방향성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 공동체 강의의 제목은 <더 큰 것을 만나는 작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이고, 두 번째 강의 제목은 <공동체를 찾는 사람, 사람을 찾는 공동체>이다. 처음 강의에서는 더 큰 이야기, 더 큰 주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중 강의에서는 어떤 공동체를 상상해야 하는지 생각해봤다. 이 글에 두 강의에서 다룬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하고, 또 강의 후에도 여전히 질문으로 남는 것들을 덧붙이려고 한다.

 

우선 두 강의를 아우르는 기본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결론(으로 제시한 개인적인 신념) 두 가지를 먼저 밝힌다. 첫째, 진리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이다. 진리의 평화적 공존을 추구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참된 것을 뜻하는 진리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어쩌면 선을 넘는 것이고, 또 이 말이 종교적 인상을 주어서 거부감을 느끼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사회나 사회적 합의에 이르는 보편성을 추구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가치의 기준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진리를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수긍할 ‘절대적인’ 어떤 것을 뜻하는 철학/종교적 개념으로 쓰는 것은 아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교실을 전제로 범위를 한정해서 사용했다.

 

둘째,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이다. 최근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거의 유일하게 인간만이 눈에 흰자위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대화할 때 딴 데 보면 안 된다. 대번에 들키고 만다. 어째서 인간의 동공이 다른 동물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게 됐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간에게 왜 관계가 중요한지 더듬어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조건이며 은유이다. 이외에도 신경과학을 비롯한 많은 분야의 연구가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공동체의 밀접한 상호 연관성을 설명한다.

 

이 두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전개한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회복적 생활교육에 동의하는 분들이 서클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텐데, 서클은 알다시피 일상에서 평화적인 하부구조를 만들고 공동체성을 높이는 소위 갈등 예방적 차원의 실천이다. 자, 그런데 서클을 해서 관계가 생기고, 공동체성이 마련이 됐다. 그럼 그다음은? 계속해서 관계만 돈독하게 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실제로 서클을 여러 차례 경험 한 학생들이 “이제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다 잘 알아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이게 내 첫 번째 문제의식이다. 나 역시 서클을 많이 하니까 서클을 한다고 하면, ‘서클? 이제 좀 다른 거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런 고민 끝에, 서클로 마련된 공동체성을 더 큰 주제, 더 큰 이야기, 즉 공적인 주제로 견인해 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가르칠 수 있는 용기」 등 파커 파머의 글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교실은 학생 중심이나 교사 중심이 아니라 주제 중심이어야 한다”라는 말에 큰 영감을 얻었다. 아울러 주제가 중심에 있고, 학생과 교사가 함께 그 주제를 파고들면서 생기는 관계의 연결망이 실재(리얼리티)라고 하는 ‘진리의 커뮤니티’란 개념을 통해서 가르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상상력을 가지게 되었다. 내용이 대강 이렇게 되고, 첫 번째 강의 결론은 ‘일상적으로 참여할 공적인 장소’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다음 강의에서는 공동체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는데, 가장 비중 있게 다룬 내용은 일본의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소개한 ‘분인(dividual)’이란 개념이다. 보통은 한 사람을 더 나눌 수 없다는 의미로 ‘개인(individual)’이라고 부르는데, 개인을 여러 개의 분인으로 나누어 보자는 아이디어다. 이것이 분인 혹은 분인주의다. 이 입장에서는 단 하나뿐인 ‘진정한 나’는 존재하지 않고, 관계마다 여러 얼굴이 있고, 그 얼굴들이 모두 ‘진정한 나’라고 말한다. 낯설게 들리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동양적인 사고방식에서 도출할 수 있는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분인주의를 통해서 공동체를 생각해 보려고 한 이유는 이렇다. 개인은 나눌 수 없지만 역설적으로 타자와는 명료하게 나뉘고, 반대로 분인은 나눌 수 있지만 필연적으로 타자와 나뉠 수 없는 존재로 한 인간을 이해하는 까닭이다. 이어서 가볍게 자유주의(또는 문화 다원주의)와 공동체주의(또는 다문화주의) 장단점을 살피면서 어떤 공동체를 상상해야 하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었다. 두 번째 강의의 결론은 ‘우리만 공동체를 찾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도 인간을 찾는다’고 상상해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새로운 공동체가 도래할 수 있는 길을 여는 상상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강의 후에도 여전히 질문으로 남는 것들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두 번의 강의 후에 더욱 분명하게 느끼는 것은 ‘공동체가 생각보다 어려운 주제’이고, ‘다른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이다. 공동체 경험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다. 그래서 공동체와 관련된 인식 또한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앞으로 우리가 만날 혹은 우리가 만들어야 할 공동체를 상상해 보자고 하면 이야기 수가 확 줄어든다. 대부분 공동체를 상상할 때, 특정한 공간에 함께 살면서 삶이나 가치를 공유하는 것을 전제로 생각한다. 아마도 이상적인 공동체 이미지에 이런 기준이 잘 부합해서일 것이다. 공간과 시간의 단일성, 그리고 강한 결속이 공동체의 장점을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단일성과 결속이 이상적인 공동체의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에는 고개를 꺄우뚱하게 된가. 좀 더 다양한 기준으로 공동체를 상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많은 분들이 온라인 만남의 한계를 느낄 것이다. 나 역시 온라인 의사소통에 따라오는 아주 짧은 시간 간격(interval) 때문에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피로도 알게 되었고, 온라인 만남을 거듭할수록 직접 대면을 대체할 만한 다른 형태의 만남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기도 한다. 웬만하면 온라인 만남은 피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우리의 욕구와 반해서 온라인 만남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래서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를 상상하자?!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너무 공동체의 이상을, 달리 표현하면 이상적인 공동체의 이미지를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단일성과 결속을 중심에 둔 함께 사는 공동체가 이제까지 우리가 상상하는 공동체의 이상적인 이미지에 가장 부합하다고 할지라도 온라인과 같은 새로운 경험들은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멈추지 말고 새로운 공동체의 이미지를 상상해야 한다고 요청하는 것만 같다. 우리는 ‘어떤 것이 이상적인 공동체인가?’만이 아니라 ‘어떤 것이 공동체의 이상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를테면, ‘온라인으로는 공동체 경험에 한계가 있다’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온라인으로 바뀌어도 계속해서 추구해야 할 공동체의 방향성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

 

몇 년 전 한 문학 팟캐스트에서 소설가 은희경이 ‘고독의 연대’란 표현을 썼다. 흥미롭다고 생각했는데, 고독의 연대는 고독한 사람끼리 만나서 고독을 이겨보자고 하는 행동주의적 실천이 아니라 우리가 각자의 고독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고 기억하면 거기서 자연스러운 연대가 일어날 것이라는 취지의 말로 기억한다. 그것이 작가가 제시한 위로의 방법이었다. 물론 비약이지만, 공동체는 그럴 수 없을까? 느슨한 연대의 공동체는 어떤가. 공동체 구성원 간의 단일성과 강한 결속의 추구에서 벗어나 서로 거리를 유지하는 공동체도 가능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공동체에 정말 필요한 것이 안전한 거리라고 생각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느슨한 공동체를 제안한다. 위에 언급한 주제 중심 사고의 연장으로,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 대한 결속력을 높이는 것보다 공동체가 추구하는 주제와 공동체 구성원 각각의 개별적 결속력을 높이는 것을 공동체의 이상으로 삼아 보는 것을 상상해 본다. 그럴 수 있다면 이상적인 공동체에 연연하지 않고, 공동체의 이상이 계속 전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낮에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애들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학교에 확진자가 나왔으니 데리고 가서 코로나 검사를 받으라는 연락이었다.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 온 일정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보건소에 들러서 검사를 마치고, 늦은 점심을 차려주었다. 며칠 전 큰애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아빠, 수학여행 가고 싶은데, 코로나 때문에 못 가.” 만남을 통해서가 아니라 만날 수가 없어서, 역설적인 방법으로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배우기도 한다. 사람에게 사람만큼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사람과 사람은 만나야 하고, 믿음직한 한두 사람 덕에 무거운 삶이 버틸만한 것이 되기도 한다. 공동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공동체 사람과 멀어지면서 결국 공동체가 추구하는 주제와도 멀어진 사람들의 얼굴이다. 사람과 다시 가까워질 수 없어서 주제와도 멀어진 얼굴에서 시작하면, 다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거리가 있었더라면, 차라리 멀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리 사이가 느슨했더라면'




위의 글은 [RJ 저널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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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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