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적 정의와 교회공동체
김주용
공동체란 말을 떠올리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따뜻해집니다. 첫 번째 기억은 청년부 때입니다. 30년 전이네요. 청년부 새내기였던 저의 집과 청년부 간사(이하 형님으로)였던 형님의 자취방이 한 골목 나란히 있었지요. 거짓말 안 보태고 새벽녘에 반팔티와 팬티만 입고 뛰어도 쉽게 왕복 가능한 거리였어요. 그때 형님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었고, 저는 대학교 신입생이었지요. 학년이 올라가고 2학년이었던 것 같은데, 군에 가기 위해 휴학을 하기까지 형님과는 같이 밥 먹고, 삶을 나누고, 신앙과 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형님은 소중한 것을 의지적으로 저에게 나누어 주신 신앙의 선배였습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올려 두고 나눌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가감 없이 나누었지요. 그러다가 새벽녘이 되면 자연스레 자매 이야기로 빠졌지요. 제가 호감 있어 하는 자매와 형님이 좋아했던 자매 이야기. 거창하게 얘기하다 깔때기로 빠져드는 자매에 대한 이야기들. Never Ending Story!
두 번째 기억은 2013년. 9년 전이니 비교적 최근이네요. 조직, 계급, 문자가 남아 있는 교회가 싫어 떠나게 된 신앙의 유학입니다. 입학허가서를 받았으나 비자를 받지 못해 실패한 유학 준비였어요. 이 기간을 통해 미국이란 나라의 권세에 눌렸었지요. 그래서 머물게 된 곳이 브루더호프의 호주 커뮤니티인 단쏘니아와 뉴질랜드의 드루리입니다. 짧은 시간 두 공동체를 방문하여 함께 먹고 자고 일하고 놀고. 두 나라에서 신앙의 유학을 통해 진짜 교회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요. 머리로서가 아니라 삶으로서의 교회를 말입니다.
자, 이제 제가 사용할 용어 정리를 해볼게요. 교회란 말 대신 ‘공동체’란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할게요. 지금의 교회란 말도 ‘에클레시아’에서 나온 말이지요. 에클레시아는 로마제국이 다스리던 시대의 ‘민회’입니다. 여기서 민회를 꺼낸 것은 교회라는 종교의 영역에 갇히지 말자는 뜻이에요. 교회 안이 아닌 세상으로 나와 보니 평화를 살고 나누며 실천하는 분들이 교회라는 제도와 틀이 아니더라도 영적으로 교감하고 교제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었지요. 그래서 불교, 유교, 동학, 기독교라는 도그마에서 한걸음 물러나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면 좋겠어요.
그럼 어떤 것을 중심에 두고 더불어 지낼 수 있을까요? 각자가 살아온 틀거리 안에서 공동체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저의 틀거리는 회복적 정의의 패러다임입니다. 저라는 사람은 기능적으로 목사의 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복적 정의를 패러다임으로 하는 회복적 교회를 통해 목사의 직을 감당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각자가 자신을 수식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빼고, 한 개인으로서 공동체를 이루고 싶은데 그 공동체의 본질을 회복적 정의라는 가치에 두자는 것입니다.
회복적 정의의 가치를 두고 더불어 살자는 것입니다. 제가 꿈꾸는 공동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관계 중심의 삶을 살아내는 곳. 회복적 정의의 패러다임은 피해자의 회복과 가해자의 자발적인 책임을 중시하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품는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공동체는 피해회복과 범죄행위의 책임을 위해서 어떤 권력이나 힘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국가 권력이 강제하는 사법제도보다는 모든 공동체원들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태도와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회복적 정의를 실천하는 삶은 어쩔 수 없이 공동체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서로 배움의 삶을 살아내는 곳.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모두가 속한 공동체 그룹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모두가 유익을 누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라온 환경과 태도와 자세 그리고 관점이 다르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교육에 힘써야겠지요. 일방적으로 누군가 전달하여 주입하는 교육이 아닌 서로를 향해 천천히 배우는 나눔이 있어야겠지요. 교회를 생각해보면, 목회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설교가 아니라 서로가 주고받는 이야기가 맞물려 울리는 목소리가 요청되는 것이지요.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같이 직면해야지요. 상호 존중해야지요. 그리고 용서와 용납이 뒤따라야겠지요. 그래도 사람이 살다보면 왜 어려움이 없겠어요!
셋째, 약속(계약)과 갱신의 삶을 살아내는 곳. 관계가 중요하고 서로 배우는 삶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연약합니다. 하루에도 마음이 백번씩 변하는 삶을 살고 있잖아요. 회복적 정의의 길을 가다보면 빠른 것도 같고 느린 것도 같고 잘 가고 있는지 회의가 들 때도 있지 않겠어요? 이럴 때 우리에게 약속이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말로만이 아닌,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가 아닌. 함께 모여 약속을 정하는 겁니다. 조금 더 무겁게 회복적 정의의 삶을 살겠다면 같은 지향점을 놓고 계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정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계약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갱신입니다. 갱신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공동체가 너무나 필요합니다. 어느 지점에서 어디까지 갱신이 필요한지는 공동체의 삶과 기억이 존재해야 하니까요.
회복적 정의의 패러다임 중에서 저에게 중요한 가치들을 제 용어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제 것이 아닌, 오래전부터 살아내 온 공동체들의 이야기들 속에서 가지고 온 가치입니다. 새로울 것이 없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자”, “살자”, “배우자”, “고치자”
우리가 배울 것은 이미 유치원에서 다 배웠잖아요. 배운 대로 살면 되는데 못 사는 거잖아요. 노멀의 시대에서 코로나 시국으로 인한 뉴노멀의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데, 우리는 노멀을 바라보잖아요. 여전히 백신이 만들어지고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사라지면 예전처럼 살 수 있겠지, 라는 희망을 갖고, 만약 우리가 그런 생각에 젖어 있다면 여전히 회복적 정의의 패러다임과 삶 속에서 살아내는 가치는 영원히 우리 옆에, 우리 안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우리 머릿속에 이상으로, 우리 머리 위에 유토피아처럼 맴돌 뿐입니다. 작은 걸음이라도 꾸준히, 함께 걸어가는 실천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서 탈성장, 탈성직, 탈성별, 탈종교를 지향하며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공동체'를 세우고 4가지 핵심 가치인 공동체, 제자도, 평화,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가족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위의 글은 [RJ 저널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독자 투고는 누구나에게 열려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research@karj.org
회복적 정의와 교회공동체
김주용
공동체란 말을 떠올리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따뜻해집니다. 첫 번째 기억은 청년부 때입니다. 30년 전이네요. 청년부 새내기였던 저의 집과 청년부 간사(이하 형님으로)였던 형님의 자취방이 한 골목 나란히 있었지요. 거짓말 안 보태고 새벽녘에 반팔티와 팬티만 입고 뛰어도 쉽게 왕복 가능한 거리였어요. 그때 형님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었고, 저는 대학교 신입생이었지요. 학년이 올라가고 2학년이었던 것 같은데, 군에 가기 위해 휴학을 하기까지 형님과는 같이 밥 먹고, 삶을 나누고, 신앙과 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형님은 소중한 것을 의지적으로 저에게 나누어 주신 신앙의 선배였습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올려 두고 나눌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가감 없이 나누었지요. 그러다가 새벽녘이 되면 자연스레 자매 이야기로 빠졌지요. 제가 호감 있어 하는 자매와 형님이 좋아했던 자매 이야기. 거창하게 얘기하다 깔때기로 빠져드는 자매에 대한 이야기들. Never Ending Story!
두 번째 기억은 2013년. 9년 전이니 비교적 최근이네요. 조직, 계급, 문자가 남아 있는 교회가 싫어 떠나게 된 신앙의 유학입니다. 입학허가서를 받았으나 비자를 받지 못해 실패한 유학 준비였어요. 이 기간을 통해 미국이란 나라의 권세에 눌렸었지요. 그래서 머물게 된 곳이 브루더호프의 호주 커뮤니티인 단쏘니아와 뉴질랜드의 드루리입니다. 짧은 시간 두 공동체를 방문하여 함께 먹고 자고 일하고 놀고. 두 나라에서 신앙의 유학을 통해 진짜 교회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요. 머리로서가 아니라 삶으로서의 교회를 말입니다.
자, 이제 제가 사용할 용어 정리를 해볼게요. 교회란 말 대신 ‘공동체’란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할게요. 지금의 교회란 말도 ‘에클레시아’에서 나온 말이지요. 에클레시아는 로마제국이 다스리던 시대의 ‘민회’입니다. 여기서 민회를 꺼낸 것은 교회라는 종교의 영역에 갇히지 말자는 뜻이에요. 교회 안이 아닌 세상으로 나와 보니 평화를 살고 나누며 실천하는 분들이 교회라는 제도와 틀이 아니더라도 영적으로 교감하고 교제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었지요. 그래서 불교, 유교, 동학, 기독교라는 도그마에서 한걸음 물러나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면 좋겠어요.
그럼 어떤 것을 중심에 두고 더불어 지낼 수 있을까요? 각자가 살아온 틀거리 안에서 공동체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저의 틀거리는 회복적 정의의 패러다임입니다. 저라는 사람은 기능적으로 목사의 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복적 정의를 패러다임으로 하는 회복적 교회를 통해 목사의 직을 감당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각자가 자신을 수식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빼고, 한 개인으로서 공동체를 이루고 싶은데 그 공동체의 본질을 회복적 정의라는 가치에 두자는 것입니다.
회복적 정의의 가치를 두고 더불어 살자는 것입니다. 제가 꿈꾸는 공동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관계 중심의 삶을 살아내는 곳. 회복적 정의의 패러다임은 피해자의 회복과 가해자의 자발적인 책임을 중시하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품는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공동체는 피해회복과 범죄행위의 책임을 위해서 어떤 권력이나 힘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국가 권력이 강제하는 사법제도보다는 모든 공동체원들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태도와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회복적 정의를 실천하는 삶은 어쩔 수 없이 공동체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서로 배움의 삶을 살아내는 곳.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모두가 속한 공동체 그룹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모두가 유익을 누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라온 환경과 태도와 자세 그리고 관점이 다르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교육에 힘써야겠지요. 일방적으로 누군가 전달하여 주입하는 교육이 아닌 서로를 향해 천천히 배우는 나눔이 있어야겠지요. 교회를 생각해보면, 목회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설교가 아니라 서로가 주고받는 이야기가 맞물려 울리는 목소리가 요청되는 것이지요.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같이 직면해야지요. 상호 존중해야지요. 그리고 용서와 용납이 뒤따라야겠지요. 그래도 사람이 살다보면 왜 어려움이 없겠어요!
셋째, 약속(계약)과 갱신의 삶을 살아내는 곳. 관계가 중요하고 서로 배우는 삶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연약합니다. 하루에도 마음이 백번씩 변하는 삶을 살고 있잖아요. 회복적 정의의 길을 가다보면 빠른 것도 같고 느린 것도 같고 잘 가고 있는지 회의가 들 때도 있지 않겠어요? 이럴 때 우리에게 약속이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말로만이 아닌,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가 아닌. 함께 모여 약속을 정하는 겁니다. 조금 더 무겁게 회복적 정의의 삶을 살겠다면 같은 지향점을 놓고 계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정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계약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갱신입니다. 갱신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공동체가 너무나 필요합니다. 어느 지점에서 어디까지 갱신이 필요한지는 공동체의 삶과 기억이 존재해야 하니까요.
회복적 정의의 패러다임 중에서 저에게 중요한 가치들을 제 용어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제 것이 아닌, 오래전부터 살아내 온 공동체들의 이야기들 속에서 가지고 온 가치입니다. 새로울 것이 없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자”, “살자”, “배우자”, “고치자”
우리가 배울 것은 이미 유치원에서 다 배웠잖아요. 배운 대로 살면 되는데 못 사는 거잖아요. 노멀의 시대에서 코로나 시국으로 인한 뉴노멀의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데, 우리는 노멀을 바라보잖아요. 여전히 백신이 만들어지고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사라지면 예전처럼 살 수 있겠지, 라는 희망을 갖고, 만약 우리가 그런 생각에 젖어 있다면 여전히 회복적 정의의 패러다임과 삶 속에서 살아내는 가치는 영원히 우리 옆에, 우리 안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우리 머릿속에 이상으로, 우리 머리 위에 유토피아처럼 맴돌 뿐입니다. 작은 걸음이라도 꾸준히, 함께 걸어가는 실천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서 탈성장, 탈성직, 탈성별, 탈종교를 지향하며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공동체'를 세우고 4가지 핵심 가치인 공동체, 제자도, 평화,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가족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위의 글은 [RJ 저널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독자 투고는 누구나에게 열려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research@karj.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