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밈으로 소비하는 민주주의의 비극
[굿모닝퓨처] 플랫폼 알고리즘 규제와 공교육 회복 없으면 '탱크데이'는 반복된다
오마이뉴스, 은재호 기자, 2026-08-10

비극이 애도가 아니라 밈(meme)으로 소비되는 시대에는 인간의 고통도 몇 초짜리 유희로 전락합니다. 최근 배재고 야구선수들이 경기 도중 스타벅스의 '탱크데이'를 소환하며 5·18의 비극을 또래 놀이로 소비한 행태는 우리 사회의 시민적 감수성이 얼마나 심각하게 마비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서글픈 단면입니다.
일각에서는 특정 역사관을 강요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의 문법을 심각하게 오독한, 어처구니없는 착각입니다. 민주주의는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보장하지만, 타인의 비극을 조롱할 권리까지 보장하진 않습니다. 독일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것을 법으로 단죄하고, 미국이 9·11의 희화화를 사회적 금기로 공유하는 것은 특정 기억을 '성역화'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이라는 최소한의 규범 없이는 공동체 자체가 존립할 수 없다는 엄중한 자각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각의 이면에는 험난했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사가 있습니다. 나치즘과 파시즘이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이용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본 '열린 사회'의 철학자 칼 포퍼는 관용의 이름으로 관용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를 용납하면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을 조롱하는 폭력을 방임하는 순간, 그 자유를 가능하게 했던 민주주의의 토대마저 함께 무너질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니 이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양한 역사관을 인정하라는 다원주의적 요구는 민주적 가치를 확장할 때 쓰여야지, 인간성을 파괴하는 혐오와 배제의 방패로 쓰여서는 안 됩니다.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가 '정의로운 기억(la juste mémoire)'이라는 윤리적 실천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습니다.
'정의로운 기억'은 과거를 우상화하는 것도, 망각의 뒤편으로 상처를 묻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정직함과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도덕적 책임감이 만나는 곳에서 피어나고 자라는 윤리적 실천입니다. 그래서 기억을 둘러싼 윤리적 실천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인지적 행위가 아니라 타자, 특히 역사 속에서 희생된 피해자들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완수하는 현재의, 능동적인 사회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주 4·3, 천안함, 세월호, 이태원 참사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의 어떤 비극도 논쟁의 대상이 될지언정 조롱의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희생자의 고통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순간, 그것은 역사 해석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에 대한 폭력이자 공동체에 대한 폭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왜곡된 민주주의의 문법을 아무렇지 않게 체득했을까요? 이는 우발적 일탈도 아니고, 몇몇 학생의 도덕적 결함 때문도 아닙니다. '디지털 네이티브'라고도 불리는 오늘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이 시대의 정서를 인터넷 공간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흡수하고 충실하게 재현했을 뿐입니다. 정치는 상대를 악마화하고, 인터넷 플랫폼은 혐오와 적대를 수익으로 전환하며, 어른들은 이를 무심히 소비하는 시대에 타인의 고통을 희롱하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 전체의 슬픈 자화상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의 해법이 개별 학생에 대한 징계나 '6개월 출전 정지' 같은 도덕적 훈육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배재고 선수들의 선처를 호소한 광주일고의 탄원은 뜻깊고 바람직하며, 두 학교 선수들 사이의 화해와 연대를 복원하는 일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회복의 노력이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 회복으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회복은 이를 넘어, 혐오와 조롱을 보상해 온 플랫폼의 작동방식을 바꾸고 학교의 교육방식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첫 번째 과제는 자극과 증오를 수익으로 전환하는 빅테크 기업의 인센티브 구조에 공적 책임을 부과하는 일입니다. 유럽연합(EU)의 디지털서비스법(DSA)과 영국의 온라인안전법은 플랫폼의 서비스 설계와 추천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위험을 기업 스스로 평가하고 완화하도록 요구합니다. 필요한 경우 알고리즘과 서비스 운영방식까지 바꾸게 하는 구조적 규제입니다.
사용자의 클릭과 댓글, 공유와 체류 시간을 늘리는 콘텐츠를 우선 노출하는 추천 알고리즘이 부정적이고 감정적인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간의 인지적 성향과 결합할 때, 플랫폼은 화해와 협력의 언어보다 배제와 적대의 감정을 더 널리 확산시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게 현대 심리학과 미디어 연구의 일반적인 관찰입니다. 그 결과 혐오는 더 쉽게 주목을 받고, 더 빠르게 확산하며,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콘텐츠가 됩니다. 유럽의 공적 규제는 바로 이 상업적 메커니즘에 제동을 걸기 위한 제도적 결단이었습니다.
반면 우리는 여전히 유해 게시물 몇 건을 삭제하는 사후 대응에 치우쳐 있을 뿐, 플랫폼 알고리즘이 혐오와 적대를 어떻게 확대하는지 묻고 감시하는 제도적 장치는 취약합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도 유해 게시물 하나하나만이 아니라, 플랫폼 알고리즘의 위험을 평가하고 완화를 요구하는 시스템 규제로 이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혐오를 만들어내는 건 플랫폼의 추천 알고리즘 자체가 아니라는 게 함정입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분노와 편견을 클릭과 댓글, 공유와 체류 시간이라는 상업적 기준에 따라 선별하고 증폭할 뿐입니다. 그 원재료는 가정과 학교, 언론과 온라인 커뮤니티 등 플랫폼 밖의 사회적 관계에서 무시로 생산됩니다. 그렇다면 플랫폼의 알고리즘을 규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번째 과제는 혐오의 언어를 비판적으로 해독하고 타인의 고통에 윤리적으로 응답할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의 역할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민주주의를 제도와 절차로만 가르치고,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슬픔에 응답하는 능력을 시민성의 핵심으로 가르치지 못한 공교육의 공백이 그 자리를 '짤'과 혐오의 언어에 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역사관을 주입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야드바셈의 홀로코스트 교육처럼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면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는 기억교육, 유네스코의 그륀발트 선언이 강조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그리고 처벌을 넘어 피해를 이해하고 책임을 회복하게 하는 회복적 정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실은 플랫폼이 부추기는 자극과 반사적 소비를 되풀이하는 공간이 아니라, 잠시 멈추고 질문하며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문제로 사유하는 공적 공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플랫폼 규제와 공교육의 강화는 서로 다른 처방이 아닙니다. 하나는 혐오와 조롱에 과도한 보상을 제공하는 디지털 환경을 바꾸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 환경을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거부할 수 있는 시민을 기르는 일입니다. 플랫폼의 알고리즘을 교정하는 제도와 아이들의 마음을 지켜내는 교실이 함께 바뀌지 않는다면, 국가폭력의 기억을 유희로 소비하는 야만의 언어는 '탱크데이'가 아닌 또 다른 표현으로 되풀이되고 말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품격은 타인의 고통을 웃음이 아니라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참고문헌
윤성우. (2019). 리쾨르의 용서론(容恕論). 현대유럽철학연구, (52), 105-126.
포퍼, K. (2006). 이한구 역.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2. 민음사. (원서출판 1945)
은재호 / 정치행정학자
은재호는 국무총리 소속 한국행정연구원에 재직하며 한국갈등학회장과 다수 정부 부처의 갈등관리심의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국가교육위원회 전문위원과 한국외국어대학교 EU융합전공 겸임교수, 프랑스 파리 1대학 PRISM-Sorbonne 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 일하며 연구 현장과 정책 현장을 이어주는 정책 중개자로 활동하고 있다. 민주주의 디자이너를 '참칭'하는 그의 저서로는 <사회갈등 해소를 위한 국민통합 전략과 실행방안 연구>(2017), <혁신적 포용국가의 국가론적 지위와 이행전략>(공저, 2019), <공론화의 이론과 실제>(2022), <경세제민의 공공리더십>(공저, 2024), <여론 속의 여론>(공저, 202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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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밈으로 소비하는 민주주의의 비극
[굿모닝퓨처] 플랫폼 알고리즘 규제와 공교육 회복 없으면 '탱크데이'는 반복된다
오마이뉴스, 은재호 기자, 2026-08-10
비극이 애도가 아니라 밈(meme)으로 소비되는 시대에는 인간의 고통도 몇 초짜리 유희로 전락합니다. 최근 배재고 야구선수들이 경기 도중 스타벅스의 '탱크데이'를 소환하며 5·18의 비극을 또래 놀이로 소비한 행태는 우리 사회의 시민적 감수성이 얼마나 심각하게 마비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서글픈 단면입니다.
일각에서는 특정 역사관을 강요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의 문법을 심각하게 오독한, 어처구니없는 착각입니다. 민주주의는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보장하지만, 타인의 비극을 조롱할 권리까지 보장하진 않습니다. 독일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것을 법으로 단죄하고, 미국이 9·11의 희화화를 사회적 금기로 공유하는 것은 특정 기억을 '성역화'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이라는 최소한의 규범 없이는 공동체 자체가 존립할 수 없다는 엄중한 자각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각의 이면에는 험난했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사가 있습니다. 나치즘과 파시즘이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이용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본 '열린 사회'의 철학자 칼 포퍼는 관용의 이름으로 관용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를 용납하면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을 조롱하는 폭력을 방임하는 순간, 그 자유를 가능하게 했던 민주주의의 토대마저 함께 무너질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니 이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양한 역사관을 인정하라는 다원주의적 요구는 민주적 가치를 확장할 때 쓰여야지, 인간성을 파괴하는 혐오와 배제의 방패로 쓰여서는 안 됩니다.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가 '정의로운 기억(la juste mémoire)'이라는 윤리적 실천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습니다.
'정의로운 기억'은 과거를 우상화하는 것도, 망각의 뒤편으로 상처를 묻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정직함과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도덕적 책임감이 만나는 곳에서 피어나고 자라는 윤리적 실천입니다. 그래서 기억을 둘러싼 윤리적 실천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인지적 행위가 아니라 타자, 특히 역사 속에서 희생된 피해자들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완수하는 현재의, 능동적인 사회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주 4·3, 천안함, 세월호, 이태원 참사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의 어떤 비극도 논쟁의 대상이 될지언정 조롱의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희생자의 고통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순간, 그것은 역사 해석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에 대한 폭력이자 공동체에 대한 폭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왜곡된 민주주의의 문법을 아무렇지 않게 체득했을까요? 이는 우발적 일탈도 아니고, 몇몇 학생의 도덕적 결함 때문도 아닙니다. '디지털 네이티브'라고도 불리는 오늘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이 시대의 정서를 인터넷 공간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흡수하고 충실하게 재현했을 뿐입니다. 정치는 상대를 악마화하고, 인터넷 플랫폼은 혐오와 적대를 수익으로 전환하며, 어른들은 이를 무심히 소비하는 시대에 타인의 고통을 희롱하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 전체의 슬픈 자화상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의 해법이 개별 학생에 대한 징계나 '6개월 출전 정지' 같은 도덕적 훈육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배재고 선수들의 선처를 호소한 광주일고의 탄원은 뜻깊고 바람직하며, 두 학교 선수들 사이의 화해와 연대를 복원하는 일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회복의 노력이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 회복으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회복은 이를 넘어, 혐오와 조롱을 보상해 온 플랫폼의 작동방식을 바꾸고 학교의 교육방식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첫 번째 과제는 자극과 증오를 수익으로 전환하는 빅테크 기업의 인센티브 구조에 공적 책임을 부과하는 일입니다. 유럽연합(EU)의 디지털서비스법(DSA)과 영국의 온라인안전법은 플랫폼의 서비스 설계와 추천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위험을 기업 스스로 평가하고 완화하도록 요구합니다. 필요한 경우 알고리즘과 서비스 운영방식까지 바꾸게 하는 구조적 규제입니다.
사용자의 클릭과 댓글, 공유와 체류 시간을 늘리는 콘텐츠를 우선 노출하는 추천 알고리즘이 부정적이고 감정적인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간의 인지적 성향과 결합할 때, 플랫폼은 화해와 협력의 언어보다 배제와 적대의 감정을 더 널리 확산시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게 현대 심리학과 미디어 연구의 일반적인 관찰입니다. 그 결과 혐오는 더 쉽게 주목을 받고, 더 빠르게 확산하며,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콘텐츠가 됩니다. 유럽의 공적 규제는 바로 이 상업적 메커니즘에 제동을 걸기 위한 제도적 결단이었습니다.
반면 우리는 여전히 유해 게시물 몇 건을 삭제하는 사후 대응에 치우쳐 있을 뿐, 플랫폼 알고리즘이 혐오와 적대를 어떻게 확대하는지 묻고 감시하는 제도적 장치는 취약합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도 유해 게시물 하나하나만이 아니라, 플랫폼 알고리즘의 위험을 평가하고 완화를 요구하는 시스템 규제로 이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혐오를 만들어내는 건 플랫폼의 추천 알고리즘 자체가 아니라는 게 함정입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분노와 편견을 클릭과 댓글, 공유와 체류 시간이라는 상업적 기준에 따라 선별하고 증폭할 뿐입니다. 그 원재료는 가정과 학교, 언론과 온라인 커뮤니티 등 플랫폼 밖의 사회적 관계에서 무시로 생산됩니다. 그렇다면 플랫폼의 알고리즘을 규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번째 과제는 혐오의 언어를 비판적으로 해독하고 타인의 고통에 윤리적으로 응답할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의 역할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민주주의를 제도와 절차로만 가르치고,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슬픔에 응답하는 능력을 시민성의 핵심으로 가르치지 못한 공교육의 공백이 그 자리를 '짤'과 혐오의 언어에 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역사관을 주입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야드바셈의 홀로코스트 교육처럼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면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는 기억교육, 유네스코의 그륀발트 선언이 강조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그리고 처벌을 넘어 피해를 이해하고 책임을 회복하게 하는 회복적 정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실은 플랫폼이 부추기는 자극과 반사적 소비를 되풀이하는 공간이 아니라, 잠시 멈추고 질문하며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문제로 사유하는 공적 공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플랫폼 규제와 공교육의 강화는 서로 다른 처방이 아닙니다. 하나는 혐오와 조롱에 과도한 보상을 제공하는 디지털 환경을 바꾸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 환경을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거부할 수 있는 시민을 기르는 일입니다. 플랫폼의 알고리즘을 교정하는 제도와 아이들의 마음을 지켜내는 교실이 함께 바뀌지 않는다면, 국가폭력의 기억을 유희로 소비하는 야만의 언어는 '탱크데이'가 아닌 또 다른 표현으로 되풀이되고 말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품격은 타인의 고통을 웃음이 아니라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참고문헌
윤성우. (2019). 리쾨르의 용서론(容恕論). 현대유럽철학연구, (52), 105-126.
포퍼, K. (2006). 이한구 역.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2. 민음사. (원서출판 1945)
은재호 / 정치행정학자
은재호는 국무총리 소속 한국행정연구원에 재직하며 한국갈등학회장과 다수 정부 부처의 갈등관리심의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국가교육위원회 전문위원과 한국외국어대학교 EU융합전공 겸임교수, 프랑스 파리 1대학 PRISM-Sorbonne 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 일하며 연구 현장과 정책 현장을 이어주는 정책 중개자로 활동하고 있다. 민주주의 디자이너를 '참칭'하는 그의 저서로는 <사회갈등 해소를 위한 국민통합 전략과 실행방안 연구>(2017), <혁신적 포용국가의 국가론적 지위와 이행전략>(공저, 2019), <공론화의 이론과 실제>(2022), <경세제민의 공공리더십>(공저, 2024), <여론 속의 여론>(공저, 202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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