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의 '그 뒤'를 몰랐다 [한겨레 프리즘 l 박수진 기자 l 2026.04.22]

202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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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의 '그 뒤'를 몰랐다

한겨레 프리즘 l 박수진 기자 l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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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국에서 정치, 문화·예술·체육, 교육 등 사회 거의 모든 영역에서 ‘미투’ 운동이 있은 한해 뒤 일본에서는 ‘#성피해자의그뒤’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있었다. 1995년, 20대 때 성폭력 피해를 당한 일본인 니노미야 사오리가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에서 ‘가해자는 피해자가 겪은 그 뒤의 인생을 모른다. 이래서는 진정한 의미의 반성도 사죄도 불가능하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것을 본 한 여성이 소셜미디어에 해시태그를 만들면서 시작된 운동이다. 수많은 피해자가 ‘피해 그 뒤’ 겪은 기억, 증상, 감정을 해시태그와 함께 쏟아냈다.


사오리는 2017년 성폭력 가해자 임상치료를 하는 ‘에노모토클리닉’에서 가해자들과 마주 앉기 시작했다. 편지를 주고받았다. “왜 나였을까. 어째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던 걸까.” 사오리는 피해 뒤 이 질문을 품고 살았고, 그 대답을 얻으려 가해자와 대화를 선택했다. ‘회복적 대화’의 일환으로 진행되던 ‘가해자 임상치료 프로그램’에 진짜 피해자가 등장한 것이다. 7년간 피해자가 가해자와 나눈 대화와 편지를 엮은 책 ‘피해자가 가해자에게’(글항아리 펴냄)에는 피해자가 경험하는 ‘그 뒤’가 빼곡하다.


2022년 9월, 성폭력 피해를 겪고 27년 뒤 사오리가 겪는 하루는 이렇다. “오전 3시 취침. 오전 4시30분 기상. 오전 7시45분 등교하는 아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뒤는 기억이 흐려져서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낮에 미술치료 강의를 하고 귀가한 뒤에도 “해리 증상이 찾아와서 한동안 시간이 날아갔어요.” 사오리는 여전히 잠을 못 자고, 신체 통증이 심해 진통제를 끼고 살고, 해리 증상 때문에 시간도, 기억도 빈 곳이 많다.


이 대화를 조율한 정신보건복지사 사이토 아키요시는 “피해자가 ‘그 뒤’를 어떻게 살았는지는 피해 실태보다 더 알려지지 않았다”고 쓴다. 2023년 일본에서 실시된 자살 의식 전국조사 결과, 성폭력 피해 경험자 중 75%가량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성폭력 피해 경험이 없는 사람의 응답보다 35%포인트 높다.


“‘#성피해자의그뒤’, 검색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몇십건, 몇백건이나 나옵니다. 피해자에게 피해와 피해 그 뒤가 있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 한구석에 품어주세요.” 사오리는 가해자들에게 편지로, 또 대면해서 호소한다. 피해자를 직접 찾고, 자꾸 떠올리라고.


사오리가 가해자에게 던진 이 말들은, 사회에 던지는 말들이기도 하다. 성폭력 범죄는 반복된다. 가해자 임상에서 그 반복의 상당 부분은 ‘가해자가 피해자와 피해를 모른다’는 사실이 작용한다고 본다. 그러나 성폭력 범죄가 발생하면 그 이후를 사법적 절차에 기댈 뿐 피해의 지속과 회복에는 무관심하다.


한국 사회도 ‘그 뒤’가 없다. 2016년 ‘#문단_내_성폭력’ 미투 때 침묵하지 않았다는 대가로, 김현진씨의 7년은 ‘1978년생 박진성’의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단했다. 2023년 11월8일, 가해자가 1년8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가기까지 7년. 김현진씨는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나고서야, “시를 읽을 수 있게 됐다”고 짧은 글을 남겼다. 세상의 여성혐오 폭력은 이어졌고, 김현진씨는 간간이 그 폭력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공유하고, 연대했다. 그리고, 2026년 4월, 생일이 며칠 지난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김현진씨는 시를 좋아하는 20대 여성이었다. 부당한 공격 속에 자신을 소모한 7년이 지난 뒤, 김현진씨가 다시 마음껏 시를 읽고 봄볕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무얼 해야 했을까. 이 부당한 싸움이 왜 7년이 되어야 했는지, 형사사법 절차의 문제점을 짚어볼 수는 없었을까. 한창 사건이 진행 중일 때 섣불리 가해자의 안부를 묻던 이들이 진심으로 사과할 수는 없었을까. 늦더라도 피해자가 소모해버린 시간을 함께 고민하며 홀로 견뎠을 현진씨의 ‘그 뒤’를 함께하지 않았음을 책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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